이 땅 어디든 사연 없는 곳이 있으랴만 충남 예산 역시 허다한 역사가 얽힌 곳이다. 그 중에서도 예산의 서편 끝자락 가야산은 빼어난 산세에다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진 곳. 조선말의 풍운아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2대에 걸쳐 천자가 난다는 지관의 말에 따라 헌종 12년(1846) 아버지 남연군 이구(李球)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가야산 기슭으로 옮기며 예산과 인연을 맺었다.

대원군은 남연군의 네 아들 중 막내. 위로 두 형은 젊어서 죽고 셋째 형이 그보다 다섯 살 많은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뛰어난 재주에 과단성 있던 대원군과는 너무나 달랐던 이 사람은 특히 재물을 좋아하는 흠이 있었다. 그런 형을 대원군은 철저히 무시하였고 자연히 형제사이는 앙숙이 되었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이최응은 민씨 일족에 의해 대원군에 대한 정탐을 위해 중용되고 동생의 정적이자 며느리인 명성왕후는 각별하게 벼슬을 챙겨주니 흥인군은 감격하여 그 은혜에 보답하리라 결심했다고 한다. 이듬해 좌의정에 오르고 이어 영의정 또 조선최초의 총리대신이 되지만 아무 얘기나 그저 옳다고만 한다 하여 별명이 유유정승(唯唯政丞). 뇌물을 받느라 집은 항상 사람들로 붐볐으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홉 개나 되는 곳간에 가득 쌓인 물건을 살피며 넋 나간 사람처럼 좋아했다고. 게다가 인색하기 짝이 없어, 좀 나누어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하인에게 `너는 먹는 걸 좋아하느냐? 나는 모여 쌓이는 걸 좋아한다.`고 응수. 곳간 속의 생선과 꿩고기가 썩는 냄새에 인근에선 코를 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이최응은 당연히 난군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들이닥친 구식군인들을 피해 담을 넘어 뛰어내렸다가 고환이 터져 쓰러진 채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임오군란 자체가 동생 대원군과 깊은 연관이 있었으니 참으로 형제는 서로 악연이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생을 마친 이최응은 가야산을 바라보는 예산군 대흥면 교촌리에 묻히고 신도비도 세워진다. 헌데 놀랍게도 예산 대흥 땅은 우리나라 `의좋은 형제`의 성지이었으니. 고려 시대 이곳에 살던 이성만 이순 형제는 우애가 너무 좋아 밤중에 형 동생을 위해 볏단을 몰래 옮기다 서로 만나게 되어 부둥켜 울었다는 일화의 본향으로, 연산군 3년(1497) 그 형제애를 자자손손 영원히 귀감으로 삼으라는 내용의 `이성만 형제 효제비`가 세워졌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오랫동안 실렸었고 지금은 그 비석을 품은 `의좋은 형제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가을엔 축제도 열린다.

그런데 이최응의 손자는 훗날 대한제국 내부대신이자 을사오적의 한 사람 이지용(李址鎔). 황제의 5촌 당숙이 나라를 판 주역이 되었다. 지독한 도박꾼에다 진주기생 산홍(山紅)에게 `제가 비록 천한 창기이나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며 톡톡히 수모를 당한 사람이었으니 이최응은 후손 복도 지지리 없었다. 그의 묘는 이후 아버지 남연군 묘 근처로 이장되었다가 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가야산은 대원군에게 천자 둘을 주었지만, 망국의 군주라는 굴욕도 주었다. 그 뿐인가. 며느리와의 처절한 사투에다 오랜 세월 피땀 흘려 만들어 놓은 황제 아들은 아버지의 장례에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못난 형과의 평생에 걸친 악연의 고리. 천지불인(天地不仁), 가야산은 말이 없다. 유창영 대전보건대 방송문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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