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서 행복한 삶은 과연 무엇일까? 조선시대 여성의 행복은 세 남자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녀들이 평생에 걸쳐 따라야 했던 남자들,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 이른바 삼종(三從)의 신분과 출세는 그녀들에게 행복의 근원이었고 그들이 가진 벼슬의 높이는 그 행복을 재는 척도였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 가장 행복했던 여성은 중종 선조 연간의 여산(礪山) 송씨(宋氏) 부인이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아버지 송질이 중종 때 영의정이었고 남편 홍언필(洪彦弼)은 인종 명종 조에 두 번의 영의정을 지낸데다 외아들 홍섬(洪暹)은 선조 시절 세 번의 영의정을 역임한 청백리였다. 조선조 최고의 벼슬 영의정은 모두 162명, 그 중 세 명과 함께 일생을 보낸 송씨 부인은 조선조 유례없는 `영의정의 여인`이었다. 게다가 세 남자는 그 즈음의 숱한 사화나 정변의 와중에서도 비교적 순탄한 벼슬살이를 하며 부친은 67세 남편 74세 아들이 82세까지 살았고, 무엇보다 본인도 무려 94세까지 건강하게 살면서 아들의 영의정 벼슬 생활을 다 지켜보았으니 그야말로 부귀영화에 천수까지 누린 복 많은 여인이었다.

그러하니 사람들의 찬사가 잇달았고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시부모에 효도하고 남편을 잘 섬겨 정경부인이 되어 해로하였으며 자식에겐 엄정하고 자애로운` 여성이자 또한 `의지와 기개를 겸비한 여장부`였다는 평도 뒤따랐다. 당시 왕비도 부인에게는 반드시 일어나서 맞으며 존경을 표했다 하며 언젠가 미국에서 펴낸 `세계 유명 여류인사`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왕조실록 중종 6년 4월에 이런 기록이 보인다. `홍언필이 일찍이 윤삼계의 여종과 사통하였는데 홍언필의 처 송씨가 그 여종을 꾀어내 매질을 하고 칼로 머리털을 잘랐으며 심지어 빗으로 그 얼굴을 긁기까지 하여 너무 참혹하므로 물의가 일어났다.` 야사에는 이후의 사정도 나온다. `그 여종을 생사도 확인하지 않은 채 땅속에 묻었다. 사간원에서 조사해 보니 매장될 당시 여종은 의식이 있었다. 그런데도 송씨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산 사람을 땅속에 묻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신혼 때 홍언필이 시중들던 여종의 손을 잡자 태연하던 송씨 부인이 잠시 후 그 여종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에게 보냈다는 일화도 있다. 여하튼 그 정도 성정이라면 알려지지 않은 일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런 사실은 남편 홍언필의 벼슬길에 별 지장을 주지 않은 듯하며, 그리고 어쩌면 영의정의 부인이자 모친이라는 위광 아래, 폭행치사 생매장에 다름 아닌 그 용맹이 바로 `기개와 의지를 겸비한 여장부`로 둔갑된 것 아닐까.

조선시대 적어도 3할을 웃돌았던 그 많던 노비는 글을 모르고 쓰지를 못했다. 그들이 남긴 기록이 없으니 역사는 말이 없다. 있다고 해봤자 식자층인 양반들이 선택하고 평가한 기록뿐. 그런 점에선 평민도 마찬가지였다. 역사라는 게 결국 이럴진대 따지고 보면 그 시대 그 사람들의 반쪽 역사도 안 될 뿐이니 역사산책 역시 그 얼마나 일면적이며 일방적인 산책인가.

2년 전 모 공중파 방송 아침 프로그램에 `조선시대 악녀열전`이 있었는데 송씨 부인이 그 악녀중의 하나로 소개된 일이 있었다. 물론 시끌벅적한 분위기에다 재미를 위해 차려진 밥상이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세상은 돌고 돈다. 유창영 대전보건대 방송문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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