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자고 간 곳에 하늘 이불 깔려 있다

풀들 늦잠을 자고

귀먹은 문고리 구부린 채 묵상에 들고

쇠스랑은 옛 주인 손길 잊지 못하고

호미, 삽, 괭이 한 촉의 꿈 버리지 못하고 있다.

여기 건네기 어려운 말이 있고

건너기 어려운 강이 흐르고 있다 심심찮게

뒷마당 장독대에 옛 주인 체온 스며들고

툇마루에서 작은 기침 소리가 썰린다

담배 부스러기처럼 옛이야기가 날리고

제 그림자에 놀라 달을 보고 짖어대던

개의 밥그릇에는 얼지 않은 눈물 고여 있다

눈부신 것들은 잠들고

빛을 잃은 것들만 남아 빈집을 지킨다

새들 그리움의 날개 짓하며 울다 떠나고

풀벌레 빈 집 막장 그늘에 남아

서러움을 뜸질하면

내 마음 밑뿌리부터 아파온다

30여 년의 시력(詩歷)을 쌓은 뒤에 50대 중반이 넘어 첫 시집을 낸 사내가 있었다. 그의 시집 대문을 장식하는 이 시는 십수 년의 그늘을 딛고 아직도 서늘하게 우리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30여 년간 썼던 시를 종교처럼 껴안고 다니다 나이 50이 넘어 시단에 조용히 얼굴을 내밀던 시인. 시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50대에 첫 시집을 내고도 가슴 설레어 부끄럼 빛내던 눈매. 그 사내의 눈에 비친 `빈집`에는 아직도 옛 주인의 손길과 체온이 오롯이 배어 있다. 개의 밥그릇에는 얼지 않은 눈물이 고여 있고. 눈부신 것들은 모두 잠이 든 채 빛을 잃은 것들만이 남아서 쓸쓸히, 쓸쓸히 빈집을 지키고 있다.

시인의 시선은 문명의 틈바구니 벗어나 이렇듯 변두리 빈집으로 가 닿느니. 생명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또 인간을 사랑하는 것. 사람들 손길이 떠나면 집은 방치된 채 기울어 가는 법이다. 그 석가래 밑에 고이는 침묵의 깊이에는 언제나 나래 펴지 못한 꿈들이 어깨를 묻고 사는 것이다. 그렇게. 시인은 바로 그곳에서 시상을 건져 올렸다. 그늘만 수북이 우거져 또 하나의 그늘 집을 짓고 있는 곳. 그렇게 이 세상에는 그늘 속에 또 다른 겹겹의 그늘들이 깔려 있는 것이다. 김완하 시인·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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