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 클래식 시장에서 부는 피아졸라(Astor Piazzolla·1921-1992) 열풍에 대해 늘 의아해왔다. 많은 연주자들이 그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들어왔기 때문에 연주회 프로그램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할 때면 나는 되레 어색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내가 비엔나에서 수학하던 시절만 하더라도 피아졸라의 작품들을 연주하기란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된 시절이 아니어서 그의 작품들을 피아노로 편곡한 악보들을 찾는 데에 많은 애를 먹었어야 했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그의 음악을 등한시하던 시각이 지배적이던 그 당시 분위기도 한몫 하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한국의 피아졸라 신드롬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아무래도 세 가지 이유로 설명될 듯하다. 우선, 우리 모두는 이국적인 것들을 사랑한다. 특별히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들은 우리에게 가장 독특하고 이국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탱고 음악은 사실 남유럽 민속음악과 19세기 파리의 살롱음악에 그 기원을 둔다. (그 때문에 유럽인들은 무의식적으로 탱고음악을 더욱 친밀하게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여기 탱고에는 유럽 음악들이 가지지 못한 관능적인 열정, 남국의 고상함, 세련된 움직임, 그리고 자유가 스며 있다. 탱고 속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이국적인 정서를 세련되게 풀어내는 피아졸라의 마법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늘 자유로움을 꿈꾸는 한국인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피아졸라 열풍은 상대적으로 덜 보수적인 한국 청중들의 태도로도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낯선 음악, 레퍼토리를 꺼려하는 비엔나 청중들과는 달리 새롭고 낯선 미지의 음악이 한국에서는 환영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한국에 온 지난 2007년 이래로 한국인들이 새로운 음악, 낯선 음악에 대해 거절하는 태도를 드러낸 것은 한번도 보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경쟁이 심한 한국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 피아졸라의 작품들은 가격 대비 최고의 성능을 자랑한다. 한마디로, 적은 노력으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말이다. 피아졸라의 곡들은 연주자의 기교적인 면을 보여주는데 최적화 되어 있지만 연습하는 데에는 의외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지 않는다. 아무튼 한국인들의 탱고 음악 사랑은 반가운 일이다. 앞으로도 계속 피아졸라 신드롬이 이어지길 그리고 낯선 남국의 작곡가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새롭게 주목받기를 바라본다. 필립 리차드슨 목원대 건반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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