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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 예술작품 및 행위에 대한 검열과 통제에 대해 다시금 되돌아보게 된다. 문화예술은 순수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의 소산물로서 문화예술이 생산되기에, 문화예술은 사회성·역사성·정치성을 띠게 된다. 사회의 현상을, 이 시대의 역사를 반영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의 사회성, 그 표현된 작품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예술로 인하여 어느 시대고 정권은 예술을 통제하려했다.

광복이 되자 문화예술계의 역사적 과제이자 사회적 흐름은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문화 수립이었다. 이에 따라 왜색가요의 음반판매와 공연이 금지되었고,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월북작가의 작품에 대해 통제를 가하였다.

개별작품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최초(?)는 1949년 9월 1일자로 금지된 `여수야화`(麗水夜話·김초향 작사, 이봉룡 작곡)이다. 이 가요는 과거 `여순반란사건`이라 불렀던 `여순사건`을 내용으로 다루었고, 당대 정상의 가수 남인수가 불렀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전남 순천지역에 주둔 중이던 좌익계 군장교들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에 불복종해 반란을 일으킨 사건으로, 정부의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 439명이 국군과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집단 희생되었다. 제주 4·3사건과 함께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빚어진 민족사의 비극적 사건이다.

여수야화의 가사를 살펴보면, "무너진 여수항에 우는 물새야, 우리집 선돌아범 어데로 갔나, 창없는 빈집 속에 달빛이 새여 들면, 철없는 새끼들은 웃고만 있네"(1절) / "왜놈이 물러갈 땐 조용하더니, 오늘엔 식구끼리 싸옴은 왜 하나요, 의견이 안 맞으면 따지고 살지, 우리집 태운 사람 얼골 좀 보자"(3절). 1절은 여순사건으로 끌려가고 희생되어 사라진 가족과 이웃을 묘사했고, 3절은 좌우익 대립에 의한 민족의 비극을 표현했다

이승만 정권은 여수야화가 인기를 구가할수록 민심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가사가 불순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민심에 악영향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음반판매와 공연을 금지시켰다. 정치적 금지였던 것이다. 이후 악보출판과 방송 등도 금지되었다.

1948년 이후 여수야화는 가요계에서 사라졌다. 심지어 1960년대 이후 금지곡의 지정 관리했던 정부기관인 `공연윤리위원회`와 `방송윤리위원회`의 금지곡 목록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이 존재했었던 자체가 기록에서 사라져버렸다. 이는 노래가 시대를 드러내고, 사회적 영향을 가짐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음악평론가/당진문예의전당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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