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은 살아있다] ⑩ 이순신기념관

관람객들이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동에서 충무공장검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윤평호 기자
관람객들이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동에서 충무공장검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윤평호 기자
대한민국 호의 새로운 선장을 뽑는 선거가 한달도 남지 않았다. 대한민국 호는 폭풍이 휘몰아치는 격랑의 바다에 일엽편주처럼 위태롭게 떠 있다. 침몰 위기의 대한민국 호를 구해내 희망봉까지 성공적인 항해를 책임질 선장은 누구일까? 우리나라 5000년 역사에서 으뜸 선장은 당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흠모와 애정은 비단 오늘 뿐이 아니다. 조선 순조 임금 때 기록을 보면 "충무공의 상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아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모두 흰 치마를 입는다"고 나와 있다.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100에 자리한 현충사는 풍전등화에 처한 국운을 살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0년간 무예를 연마하며 구국의 역량을 키운 곳이다. 그 자리에 장군을 기리는 사당을 세운 후 300여 년이 흘렀다. 충무공탄신 466주년을 맞아 2011년 4월 28일 `충무공 이순신기념관`이 들어섰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은 2005년 현충사종합정비 기본계획에 따라 2006년 기본설계, 2007년 실시설계를 거쳐 2008년 착공해 2011년 4월 28일 준공·개관했다. 기념관은 충무공관련 유물과 임진왜란 당시 해전 사료를 수집하고, 이를 전시·교육하기 위한 역사 테마관이다. 연면적 3104㎡(939평)에 지하 1층, 지상 1층의 철근콘크리트 구조이다.

기념관은 건축가 이종호씨가 설계했다. 잔디를 입힌 언덕 모양의 두 건물(사무동과 교육관) 속에 흙벽을 입힌 전시동이 안겨있는 형상이다. 현충사 준경내 지역에 들어오면서 기존의 경관을 거슬리지 않게, 자연 지세를 최대한 살렸다.

이순신기념관 전시동에서는 국보 76호 `난중일기`를 볼 수 있다. 난중일기는 충무공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 1월 1일부터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의 생활을 기록한 일기이다. 원래는 임진, 계사 등 해를 나타내는 간지만 적혀 있을 뿐 특별한 이름은 없었다. 정조 임금이 `이충무공전서`를 펴내면서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충무공이 직접 쓴 초고본으로는 임진·계사·갑오·병신·정유·무술년의 일기가 남아 있으며, 을미년 임기가 없고 정유년 일기가 두 권이므로 현재 모두 7권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충무공전서`에는 을미일기를 비롯해 초고본에는 빠진 부분이 들어 있기 때문에 서로 보완이 된다. `난중일기`에는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의 전투 기록 뿐만 아니라 충무공이 가족, 친지, 상관, 동료, 부하들과 겪은 일상이나 자신의 건강에 대한 소소한 사실까지 기록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전시동에는 국보 76호 `임진장초`도 있다. 임진장초는 충무공이 임진왜란 당시에 겪었던 주요 전투 상황과 수군 운영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 등을 조정에 보고한 문서인 장계를 다른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을 말한다. 1592년ㅂ 터 1594년까지 총 61편의 장계가 수록되어 있다. 해전에 대한 보고는 출동부터 전투 상황과 결과를 눈에 보이듯이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전투 중 공로를 세웠거나, 죽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은 장수 뿐만 아니라 병졸이나 천민들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임진장초는 임진왜란 해전사를 연구하는 데 더 없이 중요한 역사 기록 유산이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아래에서 같이 싸웠던 일반 백성들 모습까지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책이다.

국보 76호 `서간첩`도 전시동에서 만날 수 있다. 서간첩은 충무공이 현건과 현덕승, 조카에게 보낸 편지와 큰 아들 이회가 현건에게 보낸 편지 8편을 묶은 것이다. 원래는 편지를 받아 본 현씨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었다. 충무공의 8대손이 현씨 집안에서 얻어 와 편지첩으로 꾸미고 종가에 보관하도록 했다. 개인간의 사적인 편지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충무공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전시동에는 보물 1564-1호 `선무공신교서`, 보물 1564-7호 `무과급제교지`, 보물 1564-12호 `충무공증시교지`도 있다. 선무공신교서는 1604년(선조 37) 10월에 충무공을 선무 1등 공신에 올리면서 내린 교서이다. 충무공의 공을 기리고 있으며 1597년 충무공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게 하고 벌을 준 것이 잘못이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아울러 상으로 노비 13명, 토지 150결 등을 내린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무과급제교지는 충무공이 1576년 무과에 합격하고 받은 합격 증서이다. 1576년 무과에는 모두 29명이 합격했다. 충무공은 이 중에서 12등으로 합격했다. 붉은색 종이에 성적, 등급, 이름 등을 썼기 때문에 홍패라고도 부른다. 충무공증시교지는 1643년(인조 21) 3월 이순신 장군에게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린 교지이다. 시호는 조선시대 공이 있는 신하에게 그 공을 찬양해 지어 주는 명예 호칭이다. 충무라는 말에는 제 몸이 위태로워도 윗사람을 받들고 쳐들어오는 적을 꺾어 치욕을 막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순신기념관 전시동에서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기 높은 전시물은 무엇일까? 현충사관리소 상설·특별전 기획 및 운영 업무를 맡고 있는 윤인수씨는 "관람객들이 빼 놓지 않고 보는 인기 1위 전시물은 이순신 장군의 장검"이라고 말했다.

전시동의 유리 벽면 안쪽에 놓인 충무공장검은 보물 326호이다. 충무공장검은 충무공이 1594년 4월 한산도에 머물고 있을 때 장인 태귀련과 이무생이 충무공에게 만들어 바친 칼이다. 칼의 길이는 무려 197.5㎝에 달하고 무게만 4㎏이 넘는다. 실제 싸움에 쓴 것이 아니라 곁에 두고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두 칼날의 한 면에는 왜적을 물리치고자 하는 기상이 담긴 충무공의 친필 글씨가 새겨져 있다. 칼자루 안쪽에는 칼을 만든 날짜와 장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칼에 새겨진 충무공의 친필 글씨 문구는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이다. 윤평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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