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거름녘, 대전역에서 오래된 친구를 배웅하고 동광장으로 내려선다. 바라만 보아도 좋은 봄이다. 겨우내 묵언수행 했던 나무들이 드디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대전역에서 가까운 대동천변에도 벚꽃이 한창이다. 대동천 좌안길을 따라 찬란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꽃길을 따라 대동천과 소제동을 걸어본다.

대동천은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하천이다. 원래 소제호가 있던 곳을 메우고 물길을 낸 것이다. 둘레가 800미터 가량에 연꽃이 무성했다는 소제호, 대동천으로 둔갑한 추억 속의 이름이다. 대동천은 평소에는 수량이 적은 조용한 하천이지만, 여름철 비가 내리면 요란법석 해진다. 비가 조금만 내려도 대동천 물이 일시에 불어나서 천변 길을 덮치고, 하상에 주차해놓은 차들이 둥둥 떠다니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대전역과 대동천 사이에 위치한 소제동은 철도관사촌으로 인해 꽤 알려진 마을이다. 행정구역상 대전 동구 중앙동에 속하는데,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철도관사가 대략 40여 채 남아 있다. 1930-40년대 일본식 건물이 손질되지 않은 야생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오래되고 낡아서 불편하고 옹색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한편으론 그런 오래됨이 사람을 불러 모으고 머무르게 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소제동에도 몇 해 전부터 예술가들이 머무르고 있다. 레지던시를 통해서이다. `레지던시(Residency)`란 예술가들이 한데 머물며 예술작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창작, 공동창작 및 거주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독립된 작업공간을 가질 수 없는 신진 예술가들에게는 예술을 꽃피울 공간이자 자양분이 되어주는 셈이다.

소제동에서 예술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2012년 `대전 근대 아카이브즈 포럼(DMAF)`에 의해 소제동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와 활동이 본격화된 이래 어떤 일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일까? 2008년 처음 소제동에 관심을 가진 이래 줄곧 소제에 머무르며, 지금은 독립단체로써 레지던시를 기획운영하고 있는 유현민 사진작가는 "주민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주민들과 분리된 삶이 아니라 주민으로서의 삶이다. 집 앞을 쓸고 닦으며 동네사람들과 일상을 건네며 살아가는 편안함이다. 예술가의 섬처럼 고립된 레지던시가 아닌 주민으로서의 삶이 소제창작촌에서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다. 솔랑산 자락 소제의 기운으로 꽃피울 예술가의 또 다른 봄이 기다려진다. 박은숙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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