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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 다시, 봄

2017-04-04 기사
편집 2017-04-04 16:3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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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지구엔 귀 밝고 눈 밝은 생명들이 참 많다. 보고, 듣고, 냄새 맡는, 저마다 지니고 있는 감각이라는 건 생존과도 관계된 것이니 그 무엇보다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감각도 타고난 운명이라 해야 할까. 먹이사슬의 하부를 차지하고 있는 약자들일수록 지니고 있는 감각은 오히려 더 뛰어나다고 한다. 하지만 지구의 막내둥이에 가까운 인류가 지구수호자의 책임을 지게 된 건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지능이란다. 별스럽게 머리 뛰어난 종(種) 하나가 온갖 악조건을 극복하고 이뤄낸 결과이겠다.

상상이지만, 처음의 인류는 여러 모로 약자였을 것이다. 때로는 힘센 동물들의 먹이가 되기도 했겠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몸을 숨길 방법도 고민했을 게 분명하다. 도구와 문명에 기대어 이러한 불리들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인류사였겠다. 육체적으로 아주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을 두고 동물적인 감각을 지녔다고 말하는 건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인류가 지구의 주인이 되는 데에는 엄청난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는 반증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동물임에 분명하지만 인류인 우리는 스스로를 다른 동물들과 동일시하기를 애써 거부하고 있다.

나는 인류가 진화했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타고난 능력을 외부의 힘에 의존하는 오랜 동안 인류는 머리만 커졌지 지니고 있던 고유한 감각은 외려 퇴화되었다고 여긴다. 이런 점에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은 인간의 감각에 관한 한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청력과 시력과 후각은 둔화되었다. 문명의 힘에 의탁하는 과정이 이어져 내려오면서 이들 감각기관들은 생존이라는 현실적인 요건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이면 되었을 것이니 말이다.

파란만장했던 이 땅의 겨울이 끝나고, 다시 봄이다. 햇살의 온기를 느끼며 마당에 나와 서서 고양이처럼 실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본다. 가까운 나뭇가지들에 물이 오르고, 지척에서 목련 한 그루가 하얀 꽃을 피우고 서 있다. 사방에서 생기가 느껴진다. 칼끝 같던 촉수가 한결 무뎌진 살랑바람에는 두엄 냄새가 섞여 있다. 다시 맞는 봄이 마치 처음인 것처럼 새롭고 신기하다. 마을 뒤편 어디쯤에서는 바퀴를 굴리는 경운기 엔진 소리가 들린다. 문명과 어우러진, 기지개 켠 만물들이 일제히 생동하기 시작한다.

그런 가운데, 문득 든 생각. 바야흐로 다시 봄인데, 내 마음은 아직도 겨울이 아닐까. 냉기와 얼음의 시간을 고집처럼 악착스레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감각은 한없이 무뎌진 채로 편리와 편안이라는 현실에 포박당해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물이 겨울을 보내고 봄 채비에 나름 부지런한데도 오직 나만이 추운 겨울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연주의자는 아니다. 건강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계절 음식들을 탐한다.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 사실은 욕망에 다름 아닌 의지로 위장한 당위성 때문에 희생당해야 하는 대상들에 대한 연민은 적은 편이다. 눈에 보이는 형상들, 귀에 들리는 소리들, 코로 스며드는 냄새들은 계절과 시기를 무시한다. 바야흐로 인류는 자연의 순리마저도 극복했다.

그러면서 드는 또 다른 생각. 그래서 나는 지금 건강하고 행복한가. 다시 온 봄의 빛깔과 냄새와 소리들이 진정 밝음이고 희망인가. 나는 눈 뜨는 씨앗들에게 미안함도 없이 봄을 맞을 자격이 있는가. 해 뜨고 지는 밝음의 시간이 길어졌다고 해서 마냥 기뻐할 수 있는가. 그게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연록의 상형문자들이 메시지를 무작위로 보내고 있는데도 반성할 줄 모르고 슬퍼할 줄 몰라서 아픈 봄. 이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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