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늦게 도착했더니 계단을 통해 지하 1층까지 장사진을 이루었다. 전시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후회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 충동에 이끌려 몸을 움직인 게으름의 대가라고 생각하며 홀로 대열에 합류하여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했다.

전시를 둘러보고 나왔더니 전시 도록이 완판되었다는 안내문이 붙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코바나 컨텐츠`가 2015년에 개최한 `마크 로스코` 전시에서 도록이 완판된 것을 보고 한 번 놀란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덜 놀라긴 했지만, 대개 도록은 비싸고 무거워서 웬만한 팬심이 아니면 사지 않는 물건이 아니던가. 이번 전시의 주인공 `르 코르뷔지에`는 팬심을 부르는 건축가였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는 행동하면서 자유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카데미를 거부하고 독학으로 건축을 했는데, 그의 문하생 앙드레 보겐스키가 말했듯이 "그의 삶이 곧 학교"였다. 르 코르뷔지에는 기존의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 하나의 양식을 추가한 것이 아니라 전에 없던 요소로 구성된 새로운 시스템을 제시하고 그것을 구현했다.

집을 "거주하기 위한 기계"라고 생각했던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을 예술로 생각하기보다는 실용적인 공간의 설계로 보았으며 치장을 없애고 본질을 드러내려고 했다. 생활에 필요한 공간의 크기를 정하고 그 요소들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주택을 설계하여 현대 건축의 기틀을 마련한 르 코르뷔지에는 현대의 건축가들에게는 물론이고 현대인 모두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건축가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화가로서 인정받기 위해 400여점의 회화와 수많은 데생, 조각과 가구 작품을 남겼지만 건축가로서의 명성에 가린 화가의 분투는 질투로 끝나고 말았다. 앙드레 보겐스키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굳어진 입술과 슬픈 눈에 비통함이 서려 있었던 걸 가끔 목격했다. 천재들이 원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성취한 것 이상의 것,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을 화가로 여겼다. 그는 건축가이기보다는 위대한 화가로 인정받기를 바랐다. 일평생 그는 이러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깊은 내면에 이로 인한 절망을 안고 살았다. 이것은 그 자신이 극복해야 하는 역경이었고 그가 매일 이겨온 전쟁이었다."

사람들은 두 종류의 일을 하고 산다. 언젠가 인삼과 산삼의 비유를 들은 적이 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인삼에 비유한다면, 자신의 개성을 펼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산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삼과 산삼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진다. 건축가로서의 르 코르뷔지에는 인삼이었고, 화가로서의 르 코르뷔지에는 산삼이었다. 산삼의 가치를 높게 쳐준다고는 하지만 산삼이 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척박한 환경을 견뎌야 하며 느리게 자라고 사람들의 눈에 띄기도 어렵다.

우리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건축가의 꿈이 작고 화가의 꿈이 크다고 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인삼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산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안정적인 자원을 얻기 위해 산삼이 되기를 포기하고 인삼이 되고 만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산삼이 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절망 속에서 전쟁 같은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르 코르뷔지에가 말년에 아내와 함께 지내던 지중해 별장은 고작 네 평짜리 나무집이었다. 성공한 건축가였던 그도 큰 땅과 넓은 집을 누리고 살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오히려 한 폭의 캔버스였으리라. 화가로서의 작업이 부각된 이번 전시를 르 코르뷔지에가 보았더라면 좋았겠다 싶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사용하던 팔레트에 자꾸만 눈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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