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성종(成宗·1457-1494)은 학문을 좋아하고 인재등용과 문화발전에 힘을 쏟아 조선을 안정기에 들어서게 한 임금이다. 그러나 서른여덟의 짧은 생애 동안 16남 12녀라는 많은 자식이 보여주듯 워낙 여색을 좋아하여 왕비와 여러 후궁들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특히 아들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를 투기가 심하다 하여 폐비시킨 후 사약을 내리니 이는 훗날 갑자사화(1504년)라는 비극을 부르는 불씨가 된다.

왕비 윤씨의 폐비 안건을 다룰 어전회의 참석을 앞두고 당시 고위관리 허종(許琮) 허침(許琛) 형제는 평소 세상사에 관해 상당한 식견을 가졌던 누님을 찾는다. 얘기를 들은 누님은 `어떤 사람의 어미 되는 이가 행실이 나빠 그 남편이 하인과 상의하여 죽였다고 한다면, 아들이 장성해 주인이 되었을 때 그 하인을 그냥 둘 리가 있겠는가?`라 하였다. 결국 형제는 누님의 조언에 따라 당일 경복궁으로 출근 도중 개울 위 다리를 건너다 일부러 말에서 굴러 떨어지며 다쳤다는 핑계로 입궐을 하지 않았다. 그 회의에 참석했던 신하들은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하나같이 죽음을 맞거나 부관참시를 당하게 되나 허종 형제는 그 화를 피해가게 된다. 이른바 삼십육계 주위상(走爲上·도망가는 것이 최상책)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택했다고 하겠다. 이후 이 다리는 형제의 이름을 따 종침교(琮琛橋) 혹은 종교(琮橋)라 불리어졌고 지금은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뒤 복개된 그 터 위에 종교교회가 자리 잡고 있어 그 옛날의 흔적을 이름으로 남기고 있다.

그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도 전해진다. 성종 13년(1482년) 8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는 날. 사약을 들고 가기로 된 승지 유순(柳洵)에게 아침 일찍 고향 포천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부인 장씨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다는 것이다. 조정에 소식을 알리고 부리나케 포천으로 달려가니 의외로 부인이 환한 얼굴로 맞이하기에 깜짝 놀라 그 내막을 물은즉 호랑이 등에 업혀가다 나뭇가지를 붙잡고 운 좋게 살아났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순은 사화의 피바람 속에서도 목숨을 보존하고 영의정에도 올랐다.

문제는 당일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가 그 집행을 맡은 사람 승지 이세좌(李世佐). 명문 광주(廣州)이씨 집안에다 형조판서를 지낸 이극감의 아들이었다. 이날 저녁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세좌의 부인은 `슬프다. 이제 우리 자손들은 씨가 남지 않겠구나. 어미가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이 훗날에 어찌 보복을 않겠는가?` 하며 탄식하였다. 그 뒤 연산군 시절 예조판서로 있던 이세좌는 창덕궁에서 열린 연회에서 임금으로부터 술잔을 받다가 실수로 임금 옷에 술을 쏟아 바로 파직되고 귀양을 가게 되며 그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 결국 윤씨에게 사약을 전한 죄로 목숨을 잃고 자식들까지 교수형을 당하니 그 부인의 탄식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임금이라는 한 사람의 성격 혹은 변덕에 따라 사람의 목숨 나아가 혈족의 목숨이 걸려 있던 그 시절, 과연 신하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았던 길이었을까? 허종 형제는 아예 자리를 피했고 유순은 부인이 살려냈지만 비운의 이세좌는 죽음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허다한 사람들이 허다한 이유로 목숨을 잃고 혈족을 잃었다. 그들의 신념이었던 성리학은 시원한 해답을 주지 못했고 그 후로도 여차하면 한 사람의 기분에 따라 죽고 사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하긴 비단 조선의 경우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유창영 대전보건대 방송문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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