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양반이나 선비들은 뛰는 법이 없었다. `족용중(足容重) 수용공(手容恭)` 즉 발의 동작은 무거운 듯이 하고 손의 동작은 공손히 하는 것이 그들의 철칙이었고 급한 모습이나 뛰는 자세는 곧 경망스러움이자 소인배들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런 풍조 속에서도 날랜 동작이나 빠른 걸음으로 권력의 최상층에 올랐던 사람들이 있었다

선조 때 이이첨(李爾瞻·1560-1623)은 세조의 묘 광릉(경기도 남양주시)을 돌보는 말단 한직 능참봉이었다.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를 일으킨 간신 이극돈의 5대손으로 못난 조상 탓에 양반사회에서 천대와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며 그의 인생은 급변한다. 세조의 영정이 모셔진 인근 봉선사가 왜군에 의해 불태워지고 이때 그는 불타는 절간을 헤치고 들어가 영정을 꺼내 당시 임금이 있던 평안도 의주를 향한 머나먼 여정에 오른다. 낮에는 숨고 밤에는 백리를 뛰었으며 왜군 진영 한복판을 두 번이나 통과했고 심지어는 의병부대에 합류해 전투까지 치렀다. 그 귀중한 영정을 품은 채 홀로 낯설고 험한 길을 숨고 달리고 싸웠으니 실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당시 실록을 보자. `광릉 참봉 이이첨이 세조의 영정을 모셔오니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나와 그를 맞았다. 조정의 명령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피난할 생각도 없이 적진 속에서 영정을 받들어 왔으니 사람들이 다 의롭게 여겼다.` 이후 그는 출세 길에 올라 광해군조엔 최고의 권력자로 숱한 물의를 일으키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참형을 당하며 조선조 대표적인 간신이 되고 만다.

조선조 말 초인적인 달리기 명수가 있었다. 이용익(李容翊·1854-1907). 함경도 명천 사람으로 보부상 출신이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는 경기도 이천의 장호원으로 피신하고 이 때 명성황후와 대궐에 있던 고종과의 비밀 연락을 맡은 사람이 바로 이용익이다. 서울 도성과 장호원은 200리길 80㎞. 그 거리를 한나절이면 달렸고 하루에 왕복 400리길을 오가며 심부름을 하였다. 그가 길을 달리면 발은 보이지 않고 팔랑팔랑 나부끼는 두루마기 자락만 보였다고 한다. 이전에 명성왕후는 이용익이 잘 달린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그를 전주감사에게 보내 문서에 발송시각을 적어 서울로 가져오게 하여 시간을 측정하였다. 아침 8시에 전주를 출발, 한양 도착이 밤 8시 무렵이었다니 500리길 200여㎞를 12시간 만에 주파한 셈이다. 요즘의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달려야만 하는 속도. 당시 조선의 흉악한 도로사정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축지법에 가깝다. 놀란 고종이 그 비결을 묻자 `두루마기가 거치적거리지 않게 꼭 잡은 다음 좀 빠르게 걷기만 하면 됩니다`라 했다고. 사진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바로 `풍채 좋은 이봉주`. 고종의 신임으로 벼슬길에 들어서 나중엔 대한제국의 재정을 책임지는 탁지부 대신에 올랐으며 현 고려대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조선의 걸음걸이는 어쩌면 너무 늦었다. 양반들의 느긋한 발걸음 아래 나라는 시들고 있었다. 족용중(足容重)만 하기엔 세상은 너무도 급한 일들이 많았으니 때론 달리기도 해야 했고 옆도 살펴야만 했었다.

이용익의 축지법 아니 서울 전주 간을 달려서 12시간. 임금님 부부가 인증한 이 역사적인 기록을 기념할 일은 없을까. 이제 곧 마라톤의 계절이다. 유창영 대전보건대 방송문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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