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영 대전보건대 교수
유창영 대전보건대 교수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많이 들어보셨을 거다. 방랑시인 김삿갓 본명 김병연. 잘 아시리라. 홍경래의 난 당시 반군에 투항한 선천부사 김익순을 백일장에서 매섭게 질타했으나 알고 보니 바로 하늘 같은 조부. 불충한 조부를 꾸짖은 손자는 불효라는 죄목 아래 결국 평생 떠돌이의 길을 택했다. 조선조 성리학적 질서 속에 충과 효는 짝을 맺고 함께 가는 좋은 동료였지만 현실에선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임진왜란 초 동래부사 송상현. 동래성이 함락될 때 그는 갑옷 위에 관복을 입고 임금 계신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곤 부친에게 이별을 고하는 혈서를 쓴다. `군신의중(君臣義重) 부자은경(父子恩輕).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모님 은혜는 가볍습니다.` 그리고 장렬히 전사, 왜군도 경탄한 조선의 충신으로 길이 남았다. 전쟁터에선 충은 공(公)이요 효는 사(私)였다.

구한말 1907년 정미년 11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의병활동이 하나로 통합되어 이른바 `13도 창의군`이 결성된다. 해산된 군인 삼천을 포함하여 병력은 1만에 이르렀고 의병장들이 만장일치로 추대한 총대장이 경기도 여주 출신의 대유학자 이인영(1868-1909). 높은 학문과 인품으로 수많은 문인들의 추앙을 받던 사람이다. 익년 1월 창의군은 결사대원을 선발하고 드디어 서울진공을 개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퇴한다. 절치부심 다시 서울 땅을 넘보는 와중에 총대장 이인영 부친의 사망소식이 날아들며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부친의 임종도 못 지키고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일을 통곡하며 자책하던 이인영이 그만 낙향해 버린 것이다. `나라에 불충함이 부모에 불효함이 되며, 부모에 불효함이 나라에 불충함이 된다. 그 도는 하나이며 둘이 아니다. 나는 부친의 삼년상을 치르고 효를 다한 후 재기하겠다.` 낙향의 변이다. 충과 효는 묘하게 뒤엉켜버렸고 의병연합군은 기세가 꺾였다. 그럼에도 군사장 허위(許蔿)를 중심으로 일본을 끈질기게 괴롭히며 싸웠으나 그 해 6월 허위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며 창의군은 지역 의병으로 흩어져 갔다.

낙향한 이인영은 노모를 모시고 경북 상주를 거쳐 충북 황간에 은신했으나 다음해인 1909년 6월 부친 성묘길에 체포되고 만다. 그는 당당히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일본을 규탄함에 조금도 굴하는 빛이 없었다. 어찌 부친상을 이유로 전장을 떠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부모의 상을 치르지 않으면 이는 불효다. 불효자는 금수와 같으며 그것은 바로 불충`이라 일갈한다. 그리고 일본천황과의 면담을 수차 요구하였다. 아마 금수의 나라 임금을 성리학의 대의로서 준엄하게 꾸짖을 생각이 아니었을까. 그 해 9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의연히 죽음을 맞는다. 마흔 둘의 나이였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충북 영동군 황간 휴게소를 지날 무렵 북동쪽을 잠시 바라다보시라. 등줄기가 미끈하며 호쾌한 산이 보일 것이다. 백화산이다. 그 앞 기슭이 그가 부친의 삼년상을 치르며 재기를 노리던 곳 황간면 금계동이다. 그리고 `의병장 이인영`으로 인터넷을 한 번 쳐보시라. 여리고도 해맑은 모습의 한 중년 사내가 보일 것이다. 효야말로 곧 충의 길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던 사람. 그의 애잔한 눈매 속에 조선 아니 대한제국의 슬픈 모습이 겹쳐져 보인다. 유창영 대전보건대 방송문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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