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미성년 관람불가`라고 표기된 영화를 보려고 가발에 사복으로 위장하고 들어가 보다가 지도교사에게 적발되면 학교에서 징계를 받아, 극장에 가보려는 시도가 무용담이던 시절도 있었다. 조조할인에 2본 동시상영 극장에서 하루 종일 영화만 보고 있으면 좋겠다는 상상만 해도 즐거웠던 극장은, 시내 어디에 있었을까?

서울에서 신극이 발생되었던 1908년쯤 대전의 인구는 1만 명 정도로서, 당시 일본연극(가부키)이 대전역전 가설극장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인 집단 주거부락이던 원동에 `대전좌`를 필두로, `경심관극장`(대흥동 대전극장자리)을 1933년 김갑순이 개장해 조선성악연구회의 판소리와 국극 공연을 시작한 것이 대전에 탄생한 최초의 극장이다. 이어서 1935년 보은에서 금광사업으로 돈을 번 일본인 호총(戶塚)이 중동에 대전극장(후에 시공관, 중앙극장으로 바뀜)을 개관해 촌선생(1935), 춘향전(1936), 아리랑(1937), 국경의 밤, 대지의 어머니, 승방비곡(1938), 유람삼천 등을 공연했다.

한국동란 직후인 1950년대 극장은 대전문화원(선화동) 극장과 군인극장(대흥동)이 있었다. 이후 1960년대 1,2층은 시민관, 3층에는 대전문화원에서 영화를 상영하였는데, 1970년대 영화연감(1977년)에 소개된 대전의 극장 수는 모두 17개였다. 개봉관인 시민관(선화동), 대전(대흥동-김종소), 신도(중동-김기양), 중앙(중동-최준영), 아카데미(중동)과 재개봉관인 고려(신안동), 중도(삼성동), 운포(서대전,명보/용두동), 자유(대흥동), 성보(용두동), 대한(중촌동), 동화(인동), 평화(성남동), 연흥(은행동-연상흠), 서라벌(대흥동), 명화(은행동)극장, 청소년회관(은행동), 시민회관(문화동)과 소극장이던 현대, 예술, 신세계 등이 있었다.

1970년대 초부터 각 가정마다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극장 숫자가 줄기도 하였지만, 새로운 시설로 1980년대부터 꾸준히 동양백화점(오영근), 갤러리아(한화그룹). 세이 백화점과 홈플러스(가오동), 롯데시네마(괴정동), 롯데시네마 대전둔산, 메가박스 대전(탄방동), MCV 아카데미(정동). CGV 대전터미날, 유성온천, 유성노은, 대전아트시네마, 씨네위(노은동)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다. 1990년 이후 다양한 영화콘텐츠를 앞세운 위성 TV와 케이블TV가 보급되어서 웬만한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영화관으로 많은 사람들이 직접 찾아가고 있다.

유병우 씨엔유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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