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60년대 대전을 상징하는 건물은 단연 중앙로 네거리에 있는 구시청(삼성화재해상보험 충청본부)으로 1939년도 대전부청사로 세워져 지금까지 견디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대견스럽다. 옛 충남도청과 대전역를 연결하는 중앙로의 중간 지점인 이곳은 당시 실질적인 상권의 중심으로 건너편에 대전법원(현 NC백화점)과 함께 세워진 관청 건물로, 1935년 부제(府制)를 실시하면서 준공해 부청사와 대전상의가 함께 사용했다. 1959년 시청을 대흥동 현 중구청자리로 옮기고, 1972년 대전상의에서 전부 매입하여 전면을 큰 수직창 3개로 바꿨다가, 1976년 보수공사를 하면서 전면에 4개의 커다란 알루미늄의 원형기둥을 강하게 넣어 지역의 상공진흥이라는 의미로 굴뚝을 상징적으로 표시했다.

1996년도에 상공회관이 둔산으로 옮기면서 삼성화재에서 인수, 외장재료를 알루미늄 판으로 바뀌고 전면의 기둥과 상부 망루가 철거되었다. 당초에는 현관 입구의 양측에는 대형의 원형창이 설치되어 있고, 2, 3층의 전면에는 넓은 창을 통해 내부가 보이고, 서측에는 긴 수직창이 있었고, 현관 지붕은 두텁고 길게 튀어나와 육중한 멋을 풍겨 주었다. 실내로 들어서면 높은 천정고가 이용자를 압권하고, 연와조 구조로 된 두꺼운 외벽은 강한 외압에도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하였고, 2, 3층으로 오르는 주계단은 전면의 양편으로 있어 3층의 강당으로 많은 사람들을 유도했다. 서측의 전, 후면에는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서 신축 시에는 대전에서 가장 높고 큰 건물이었다.

시민의 편의보다는 효율적인 지배를 위하여 중심부에 자리하였는데, 해방하면서 미군정청과 대전시청으로 사용하면서 한국동란을 맞게 된다. 전쟁 중에는 북한군이 옥상에 미군포로를 머물게 하여 비행기의 폭격을 피하였고, 유엔군은 비행기로 비상식품을 투하하기도 하였다. 60년대에 상공회의소에서 1,2층만을 사용하면서, 3층은 `청소년회관`으로 만들어 `기적`, `왕과 나`같은 외화상영과 졸업식, 유명인사 초청강연 및 연극 공연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추억의 장소였다.

50년대에는 미공보원(전 대전문화원)은 망루에 대형 스피커를 설치해 오후 5시 하기식이 끝나면 미국의 최신 팝송을 들려주기도 하였고, 망루 끝에서 보문고등학교의 권오창 체육교사가 물구나무서는 묘기를 보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1960년도 3·15부정선거 때, 이곳 3층 강당에서 개표를 진행하다가 대중들에 의하여 투표함이 창문 밖으로 내 던져져 흩어지는 기표지를 보면서 시위대가 함성을 지르던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지난 대전의 영화를 홀로 간직한 채, 예쁜 은행동파출소와 나란히 색 바랜 모습으로 묵묵히 서 있다.

유병우 씨엔유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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