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김일엽·이광수 등과 한시대 풍미 긴 수련과 실험으로 꽃을 피운 작품세계 근대 예술적 전통 스며든 대전에 고스란히

서울대 국문과 방민호 교수
서울대 국문과 방민호 교수
며칠 전 비가 흠뻑 내리는 날이다. 그날도 무궁화호를 타고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역 앞 한의원 골목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잘못 타 서대전 사거리 못 미쳐 내려서는 결국 택시를 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하철을 타는 건데 잘못 했다고 생각하며 택시에서 내리니, 빗줄기가 몹시 굵어져 있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려니 마음이 바쁘다. 하지만 그 순간 눈에 들어온 대전 예술의 전당이며 시립 미술관의 전경이 시름을 잊게 한다.

이제 한결 여유를 되찾고 다른 한 쪽 옆에 놓인 이응노 미술관을 들어간다. "유유자적"이라. 이번에 이응노 미술관 소장품 전시회 이름이 바로 이것이다.

아마도 여기 오고자 했을 때 이미 감동을 준비해 두었는지도 모른다. 이응노라 하면 너무나 친숙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응노, 하고 그 이름을 부르면 그 이름 옆에 나혜석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이름이 함께 딸려 나온다. 또 그 옆에는 그녀와 더불어 한 시대를 풍미하다 승려가 된 김일엽 스님이 계시고, 또 그 이름 옆에는 `유정`이며 `사랑`이며 `흙` 같은 명작을 남긴 이광수가 있다. 이응노는 그와 같은 근대 초기 인물들의 신비로운 세계 속에 함께 놓여 있다. 비록 그들보다 십 년 정도는 늦게 태어난, 그래서 후배지만 그들만큼이나 고색창연하고 또 그러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예술 세계에까지 다다른 그.

그 이응노는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출생했다. 자라기는 예산군 덕산면에서 자랐다고 한다. 필자가 바로 그 덕산 출생이다. 지금도 외갓집이 있는 덕산은, 옛날에는 온천장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고, 포장 안 된 신작로 길이 예산에서 삽교를 지나 와, 한 줄기는 고덕으로 갈라지고 또 하나는 수덕사 있는 쪽으로 갈라지는 교차로 역할을 했다. 덕산 온천을 지나 걸어서나 버스로 더 깊이 들어가면 수덕사 절이 나오는 법이었다. 그 절 밑에 더 옛날에 수덕 여관이라는 숙박집이 있고, 여기에 이응노도, 나혜석도 오래 묵었고, 김일엽은 그 산 위 비구니 암자 견성암에 머물렀다.

필자의 마음속에 사는 이들은 늘 낭만적인 상상적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이응노와 나혜석은 나이가 여덟 살이나 층이 지지만 예술에 미친 사람들로서 그들만이 나눌 수 있는 교감을 나눈다. 그 옆에, 이 예술 세계에 뛰어들 수도 그것을 나눌 수도 없는 한 사내가 있다. 그는 불행의 나락에 빠진 나혜석을, 그녀의 그림을 월급을 다 바쳐 사가며 사로잡고 싶어 하나, 끝내 두 사람이 벌이는 예술적 인생의 쓸쓸한 그림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는 바로 필자의 외조부다. 실제로 그는 나혜석이 가져 온 그림 세 점 가운데 하나를 그렇게 샀고 그것을 나중에 유족에게 되팔았다.

미술관 실내로 들어가 관람료를 자그마치 오백 원이나 내고 전시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단번에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놀라움이 있다. 그가 그린 대나무를 보노라면, 닭이며 원숭이를, 꽃송이들을 보노라면 그가 그림을 그린다는 기예를 위해, 또 그 기예를 정신적 수련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동양화, 한국화에서 출발하여 일본으로 나아가고, 또 거기 머무르지 않고 유럽으로 나아갔다. 불행한 정치적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세계를 뒷받침 해 준 긴 수련의 과정을 필자는 이 "유유자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진짜 그림이 이렇듯 지난한 수련과 실험에서 나오듯 글 또한 그만한 축적을 거쳐야 함을 새삼스레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이 이응노를 기념하는 미술관이 바로 대전에 있음을 알게 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생겨난 지가 십 년이 다 되어 가다시피 하건만 이제야 이 미술관의 회원으로 가입했다. 미술관에 딸린 까페 `프레 생제르베`에서 커피 한 잔을 놓고 창밖의 한 폭 수묵화 같은 비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대전에는 이미 우리 근대의 예술적 전통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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