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이 없어도 마음을 나누는 삶 주변 사람들 문제 고민·해결 참여 성의 있는 인간관계가 이상적 사회
앙가주망이라 하면 흔히 `사회 참여`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데가주망은 그 상대어일텐데. 하지만 뜻이 명확하지만은 않다. 찾아 보는 수밖에 없다. 사전류에 이렇게만 나와 있다. `장래의 새롭고 자유로운 계획을 세워 나갈 때, 이전에 있었던 자기 구속에서 자기를 해방하려는 경향.`
앙가주망이라는 말은 사회 참여 이전에 `구속됨`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면 데가주망은 구속됨을 넘어 현실의 자장 너머로 이탈해 감을 뜻하는 것일까. 뜻이 조금 좁혀진 것도 같다. 하지만 여전히 불확실하다. 어떻게 한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사르트트의 책 `존재와 무`를 펴드는 것, 다른 하나는 가까운 분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다행히 중앙대에 사르트르를 전공한 불문학 교수가 계시다.
책은 사고, 한편으로는 그 선생님께 연락도 드려보는데 전화번호가 바뀌었다. 오랫동안 연락을 못 드렸던 것이다. 연락처를 새로 알아내어 전화를 드리고 아무 날 아무 시에 만나기로 했다.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할 때 책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도 좋다. 하지만 더 좋은 것은 그것을 잘 아는 분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한번에 문제의 윤곽까지, 관련된 다른 것까지 깨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안에서 대강의 뜻을 알아낸 후 드디어 그분을 만나는 날이 왔다. 며칠 전 저녁이다. 웬 종이가방 하나를 들고 나타나셨다. 무슨 짐을 들고 퇴근하시는 길이신가 했다. 헌데, 아니다. 종이가방 안에는 책이 세 권, 복사물이 한 권 들어 있고, 그게 전부 질문을 드린 필자를 위한 것이었다.
저녁식사를 겸한 자리에 앉아 그분과 사르트르며, 앙가주망이며, 데가주망이며, 또 사르트르가 쓴 소설 구토의 의미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은 당신의 스승인 정명환 선생이 쓰신 책 중에 데가주망이라는 말 말고 데상가주망이라는 말도 나온다고 하시니, 필자는 그 데상가주망을 함석헌과 이어령의 대담 속에서 본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데가주망이나 데상가주망이나 모두 앙가주망의 반대의 뜻이 있고, 사르트르는 이 말을 자기 저술의 전개 과정에서 경우에 따라 달리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한국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관심이 한창이던 때는 1950년대, 1960년대였다. 그 무렵 사르트르가 제시한 지식인의 사회 참여, 즉 앙가주망이 지식인들 사이에 중대한 주제로 입에 오르내렸다. 최인훈의 회색인을 쓴 게 그 무렵, 1963년부터 1964년 사이였다.
이제 어느 정도 분명해진 것을 말해 보면, 최인훈은 다른 이들이 당면한 사회 문제를 놓고 참여를 고민할 때, 당대의 담론적 지형을 뛰어넘어 더욱 이상적인 사회체제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인간관을 구축하고 싶어 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데가주망이었다. 하지만 이 글의 요점은 그게 아니다. 누가 무엇에 대해 물었을 때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세 권을 찾아들고 또 필요한 부분을 복사까지 하려 할 수 있었을까? 그날 실로 오랜만에 한 성의 있는 인간을 만난 듯한 실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분은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게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귀한 시간을 내시고 또 당신의 책까지 후배를 위해 물려주신 것이었다.
`맹자`에, 양나라(=위) 혜왕이 이로움을 말하니, 맹자가 왕을 나무라는 대목이 나온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하필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쩌면 양혜왕들의 시대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런 때 어진 성정으로 인과 의를 찾음은 정녕 어리석기만 한 것일까? 최인훈이 쓴 `회색인` 소설 속에서 독고준이 찾는 이상향은 사실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물음, 회색인이 필자에게 선사한 망외의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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