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초창기 건축계의 맏형을 꼽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근대건축에 이삭을 뿌린 춘성 유원준(1909-1993)을 이야기한다. 대덕군 유천읍 210(현 중구 유천동)에서 태어나 삼성초등학교와 대전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전신인 경기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조선총독부 영선계에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 정회원으로 많은 건축물을 설계 감리하였다. 해방 이후 대한토건협회 창설이사로서 당시 불모지나 다름없던 건축 토목계 단체의 산파 역할과 재정적 후원을 자임하였다.

1946년 `신광토건사`를 설립해 지원병 훈련소, 함흥 명보극장, 중앙보육학교, 전 윤보선 대통령 안국동저택, 유진오박사 저택신축, 대한상공회의소 신축, 건설협회회관 건립 등 큰 공사가 그의 손을 거치면서 5·16 군사혁명 전까지 수주액이 가장 큰 건설회사로 발전했다. 그러나 혁명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해 사업을 접게 되었는데, 끝내 회사를 매각하지 않고 분해시켜 버렸다.

당시 고향인 대전 충청지역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유등천변 현 버드내아파트 단지에 있던 한국조폐공사 대전공장, 대흥동 한국은행 대전지점과 청주지점, 원동 한빛은행 대전지점, 신현술 산부인과의원 등이 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특히 원도심의 중심인 중앙로네거리 모퉁이에 있던 옛 한국은행 대전지점은 그의 대표작이다. 이곳은 1918년 충남 자동차 운전면허 제1호인 문갑동씨가 세운 운전교습소가 있던 곳으로, 1949년 한국은행 대전지점을 착공해 기초공사 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중지하였다.

수복 후 현장을 수습하여 1953년 준공한다. 건너편 삼성화재 충청사옥(구 시청)과 함께 오랜 시간을 대전의 중심점으로 지내온 이 근대건축물은 2000년 개인에게 넘어갔다. 백화점을 지으려는 건축심의에서 전면 파사드(입면)를 살리어 지하역사로 만드는 조건으로 통과하였으나, 착공 후 지하 터파기를 진행하면서 붕괴 위험 이유로 철거되고 말았다. 그러다 시행하던 건설사의 부도로 인해 공사가 중지되어 현재까지 흉한 골조만 드러낸 상태로 15여 년째 버려져 있다.

원도심에서 가장 번화가인 옛 충남도청과 대전역의 중간지점인 중앙로 네거리에 오랫동안 가설울타리를 쳐놓은 남루한 모습은 정말 안타깝다. 차가운 바람에 유치권 행사 중이라는 플랜카트만 힘없이 나부끼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방치된 모습을 지켜보는 많은 시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차라리 시작하지 않았으면, 원로 건축가의 유작으로 영원히 우리 곁에 남을 수도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만 쌓인다.

유병우 씨엔유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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