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만큼 여러 상(賞)과 패(牌)가 난무하는 곳이 드물다. 시상식이 몰려 있는 연말이 되면 국회의원들마다 의정활동 우수 3관왕이니 5관왕이니 하며 자화자찬하는 촌극이 벌어진다. 그런 의원들이 꼭 받고 싶어 하는 상이 하나 있다. `백봉신사상(白峰紳士賞)`이다. 신사적 언행과 리더십, 모범적 의정활동을 편 국회의원에게 주는 상이다. 매년 12월 국회를 출입하는 정치부 기자 200명 안팎이 설문조사에 참여해 선정하는데 그때마다 곤혹스러워 하는 기자들이 없지 않다. 특히 올해가 그랬다.

대상의 영예는 박근혜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워 몸값을 올린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 유승민 의원에게 돌아갔다. 베스트 10 수상자는 공교롭게도 국회의장이거나 전·현직 당 대표 등 당직 물을 먹은 인물이다. 인지도가 높게 반영된 데서 보듯이 수상자 선정 과정은 어려웠다. 이들이 부적격자라서가 아니라 더 나은 후보를 찾을 수 없었던 건 아무래도 아쉽다. 국민들에게 선정의 권한을 준다면 어떤 의원을 뽑을지 궁금해진다. 독립운동가이자 제헌의원을 지낸 백봉 나용균 선생은 후배들을 따뜻하게 격려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 정치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고 싶었을 것이다.

비판의 목소리로 정치를 바꾸고 싶어한 이도 있었다. 1995년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은 베이징에서 한국특파원들에게 `정치는 4류`라고 발언해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이 회장은 "행정규제, 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으면 21세기에 한국이 일류 국가로 될 수 없다"며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일갈했다. "반도체 공장 하나 짓는데 도장 1000개가 필요하다"는 이 회장의 하소연이 새삼스럽다. 지금 우리 정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현실은 대선배나 글로벌 기업인의 기대대로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다.

역대 최악으로 평가되는 19대 국회는 어제 마지막 정기국회를 짙은 오점을 남긴 채 마쳤다. 여야는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몇몇 법안과 내년도 예산안을 주고 받았을 뿐 민생을 돌보는데 소홀히 했다. `합의후 처리`키로 약속했던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안 같은 경제활성화 법안은 상임위의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 참여정부 등에서 추진해온 서비스산업 경쟁력 강화 대책에 왜 갑자기 제동이 걸린 건지 납득하기 어렵다. 도장은 여전히 1000개가 필요하고, 청년층의 일자리 창출은 가물가물해졌다.

의원들은 어떤가. 모범적 의정 활동은 고사하고 저질 경쟁이 민의의 전당을 어지럽혔다. 집권여당의 박대동 의원은 `비서관 월급 상납` 의혹으로 당의 진상조사를 받는 처지에 몰렸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노영민 의원은 의원실에 신용카드 단말기를 설치하고 시집을 강매했다는 의혹 끝에 산업통상자원위원장 자리를 내놓았다. 같은 당 신기남 의원은 로스쿨 졸업시험에 낙제한 아들을 구제하기 위해 외압을 행사했다는 논란에 휩싸이는 등 미생(未生)을 상대로 한 선량(選良)의 갑질 행태는 열거하기가 부족할 지경이다.

여야는 진영다툼 속에서도 기득권을 지키려는 짬짜미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했다. 공전을 거듭하고 있는 선거구재획정 작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해를 넘기면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모든 국회의원 선거구가 무효가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당장 15일부터 후보자 예비등록이 시작되건만 얼굴 알리기 바쁜 정치 신인들은 옴짝달싹 못하게 생겼다. 선거구야 어찌됐든 현역 의원들은 프리미엄을 누리게 된다. 급할 것 없다는 정치권의 태평과 뻔뻔함이다.

백봉신사상이 제정된 지 17년이 흘렀고, 이 회장의 발언이 나온 지 꼭 20년이 됐다. 옛 격언이 맞는다면 강산이 두 번 바뀌어야 하는 세월이다. 여의도는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헬(Hell·지옥) 정치`로 퇴보했다. 야당의 집안 싸움은 분당(分黨) 문턱으로 갔고, 여당은 반대급부를 즐길 뿐 국민 마음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희망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이 절망스런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는 건 국민의 몫이다. 유권자의 위대한 힘이 아니고선 헬 정치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냉소 대신 참여와 감시로 헬 정치를 폐해야 한다.

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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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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