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아산 민간인 희생자 실태와 현재 上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62년이 흘렀지만 전쟁의 생채기는 여전하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무고하게 숨진 민간인 희생자들의 추모 사업은 지지부진해 개선이 요구되고 있다. 더 이상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한국전쟁 당시 아산 지역 민간인 희생자 실태와 현재를 2회에 걸쳐 보도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전쟁 중인 1950년 9월 하순부터 1951년 1월 초순까지 온양경찰서 경찰과 그 지시를 받은 대한청년단 등의 치안대가 북한군 점령 당시 북한군에 협력한 부역자이거나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지역 주민 다수를 배방산 방공호, 배방면 수철리 폐금광, 염치면 대동리 일대 등에서 집단으로 살해했다. 과거사위원회는 이 사건을 `아산 부역혐의 희생사건`으로 명명했다.

과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온양읍에 거주한 김모씨 형제는 집 뒤 방공호에 은신하던 중 1950년 10월 3일쯤 치안대원 십여 명에 의해 그릇 굽는 가마에 감금됐다가 배방면 폐금광에서 살해됐다. 온양군 탕정면에 거주한 다른 김모씨는 같은 해 7월 2일쯤 면사무소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가 탕정지서로 연행돼 감금됐다가 인근 방공호에서 살해됐다.

염치면 대동리에 거주하던 문씨 형제는 1950년 9월 북한군 점령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치안대에 의해 삼서국민학교 운동장에 끌려가 몽둥이로 살해됐다. 문씨의 아내와 아들, 어머니, 형제, 누나 등은 같은 해 10월 1일 회의에 나오라는 안내를 받고 마을 곡식 창고로 모였다가 인근 뒷산 방공호로 끌려가 살해됐다. 문씨의 아버지도 같은 해 10월 15일 회의에 소집돼 마을 곡식 창고로 갔다가 치안대에 의해 살해됐다.

탕정면에 거주한 이모씨는 1950년 10월 초순 북한군 점령기 좌익활동을 했던 경력 때문에 대한청년단에게 연행되어 장모씨의 사랑채에 감금됐다가 살해됐다. 같은 달 하순 이씨의 아내와 아들, 형, 동생 등도 탕정지서로 연행돼 탕정지서와 탕정면 곡물창고에 나누어 감금됐다가 살해됐다. 염치면 대동리에 거주하던 홍모씨와 그의 아내, 아버지, 어머니, 고모, 누이, 형제, 아들 등 가족 대부분은 1950년 9월 27일 치안대에 의해 감금됐다가 대동리 인근 공동묘지에서 살해됐다.

배방면에 살던 김모씨는 1950년 12월 초 온양경찰서에 구금됐다가 살해됐다. 김씨의 아내와 자녀들도 배방면지서 경찰에 의해 면사무소 창고로 연행됐다가 살해됐다.

과거사위원회는 2년 여의 조사를 거쳐 아산 부역혐의 희생사건을 지난 2009년 5월 `민간집단희생`으로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

과거사위원회는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부역자 처리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살해됐고 특히 부역혐의자의 가족들은 단순히 가족이라는 이유로 살해됐다"고 밝혔다.

과거사위원회는 아산 부역혐의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이 최소 800여 명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윤평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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