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물상형(應物象形).

5세기경 중국 남제의 화가 사혁이 제시한 `화론육법` 중 하나로 사물을 본대로 그리라는 얘기다. `화론육법`은 사혁이후 근대기까지 동양화단을 지배한 기본덕목이자 철칙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사실성이 떨어지는 그림은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다. 사진이 없던 시대였으니 여북했겠는가. 조선시대 문인들의 야유회 모습을 그린 계회도는 응물상형에 충실한 작품 중의 하나다. 그림과 함께 계회 명칭은 물론 때와 장소, 참석자 이름, 호, 본관, 당시 품계와 관직까지 기록을 했다. 요즘 스마트 폰으로 인증 샷에 설명까지 곁들인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술적 가치에 사료적 가치까지 지닌 기록화와 진배가 없음이다.

개화기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이 그린 `탑원도소회도(塔園屠蘇會圖·1912)`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제목은 `탑원`에서 열린 `도소회`를 장면을 그렸다는 의미다. `탑원`은 심전의 친구인 화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오세창 집을 가리킨다. 오세창이 자신의 집에서 탑골공원 원각사탑이 잘 보인다고 당호를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도소회`는 `도소주(屠蘇酒)`라는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모임을 뜻한다. 도(屠)는 `잡다`, 소(蘇)는 삿된 기운(邪氣)을 뜻한다. 정초에 친구와 어울려 도소주를 마시는 것은 사악한 기운과 악귀를 물리치는 일종의 주술적 행위다.

도소회에는 심전과 오세창 외에 손병희, 권성범, 최린 등도 함께했다고 전한다. 화가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사람들인데 정초에 만나 덕담만 주고받을 리가 만무하다. 나라를 빼앗긴지 1년 4개월 된 시점에 만났는데 모르면 몰라도 국권회복을 위한 얘기가 진지하게 오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림을 보면서 3·1만세운동을 주창한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최린 등은 이때부터 만세운동을 준비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림은 뿌연 밤안개 사이로 멀리 원각사 탑이 보이고 누각에는 일곱 선비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다. 울창한 숲과 밤안개가 어울려 누각 아래는 거대한 호수처럼 보인다. 근경은 농묵, 원경은 담묵을 써 농담의 대비와 함께 서양화 기법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심전은 장승업의 제자로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다. 후학 양성을 통해 근대 전통화단을 여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대표 화가다. 충남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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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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