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은 십장생의 하나로 고고한 자태의 선비를 상징한다. 비상하는 학은 신비감을 줄 정도로 우리에겐 특별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학은 장수와 고결함의 대명사로 인식된 탓인지 선비들이 즐겨 그리던 문인화의 단골 소재였다. 그런데 월전 장우성(1912-2005)은 무슨 생각에 학이 병들어 죽기 직전의 비참한 모습을 그렸다. `오염지대(1979)`가 바로 그렇다는 얘기다. 병든 학의 이미지를 통해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오염 문제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것이다. 화가는 그림으로 `공해 경보`를 발령한 셈이 된다.

월전은 이런 신개념 문인화를 평생 추구했다. 환경오염과 이데올르기 등 사회적 문제를 비판하고 지적하는 이른바 참여 예술을 통해 담론화 작업을 계속했다.

`오염지대` 속에 있는 학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배경까지 칙칙하다. 고결함을 상징하던 학이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나래를 편 채 웅크리고 앉아 있다. 고고한 자태나 우아한 모습으로 창공을 나르던 학의 모습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원인은 오염된 환경 탓이다.

우측에 한자로 쓴 화제의 보면 그림 내용이 명확해진다. `인간은 근대화를 원하나 공해가 이리 심한줄 짐작이나 했겠는가. 불 바람은 대기를 더럽히고 독기 품은 오수는 강과 바다를 물들여 초목은 말라들어 가고 사람과 가축은 죽어간다. 뉘우친들 무엇하리, 인간 스스로 지은 죄인 것을.`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미적인 면만 추구하던 전통적인 문인화의 본령과는 거리가 먼 화제(畵題)다. 산업화에 따른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을 병든 학을 통해 고발을 하고 있음이다. 죽어가는 학을 보면서 예술가로서 어찌할 수 없는 한계가 절절하게 묻어나는 작품이다. 월전의 현실 참여는 환경문제에 그치지 않고 이데올르기와 민족주의까지 확산된다. 휴전선 철조망 위를 자유롭게 나르는 새들을 통해 남북 분단을, 수입 외래종인 황소개구리에게 삶의 터마저 빼앗긴 토종 물고기의 비애감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환경과 이념의 문제는 물론 수입품이면 무턱대고 좋아하는 맹목적 사대주의가 종래는 우리의 건전한 의식과 정체성을 무참하게 파괴한다는 무엄한 현실까지 웅변하고자 한 것이다. 월전은 경기 여주 출신으로 서울대와 홍익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충남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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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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