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를 쓰면서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을 심심찮게 받는다. 작가는 작품으로 독자와 소통하는 사람이다. 내 작품의 주 독자가 초등학생인 어린이고 보니 현실적으로 40여 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다. 다음으로 어려운 것은 작가로서 독자인 아이들에게 날것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적절한 복선과 은유로 현실적인 문제를 정제시켜 느끼게 해주려 하고 부득이 표현을 하더라도 직설적이지 않게 살짝 돌려놓는다. 그 정도만 해도 독자인 그들은 안다. 혹자는 이러한 작품 성향에 대해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우려를 한다. 과연 그 우려가 합당한가 묻고 싶다. 적어도 작품이란 작가에 의한 가공과 정제의 산물이고 그 산물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작가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창작이란 날것을 익혀 독성을 빼내는 행위인 것이다.

지난 5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가 `잔혹`이라는 말이었다. 당시 출판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은 `동시`라는 문학의 한 장르 앞에 접두사처럼 `잔혹`을 붙여 놓았다. 그리고 `잔혹 동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까지 했다. 서둘러 `잔혹 동시`라고 명명되는 아이의 글을 읽어 보았다. 글에서는 `잔혹`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엽기적인 행위들이 날것인 채로 섬뜩하게 나열되어 있을 뿐이었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 `아, 이 일을 어쩐다?` 이것이었다. 분명히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일 텐데 필자인 아이가 감당해야 하는 무게치고는 엄청나리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파장은 예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급기야 출판되어 유통되는 책을 전량 회수하여 파기하는 사태가 생겨 사건이 일단락되었다고는 하지만….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이런 의문들로 인해 지금까지도 마음이 개운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표현의 자유다`라고, `지금 우리 아이들의 현주소다`라고 또는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어른들이다`라고 자성의 의견들이 분분하다. 의견 제시자 또한 공동으로 책임을 느끼고 있다는 표현일진대 그럴수록 더 공허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표현의 자유`만 해도 그렇다. 글을 쓴 필자의 개인적인 자유일 뿐이지 결코 글을 읽는 독자의 자유는 될 수 없다. 글이 활자화가 되어 출판이 된다 함은 일기장에 적어 개인이 보관하는 글과 차원이 다르다. 아동문학은 주 독자를 어린이로 두고 있지만 절반의 독자는 부모들이다. 과연 그 글을 읽고 `표현의 자유다`라고 가치 있게 여길 부모 독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 이 정도의 판단 없이 출판이 되었다면 오히려 행위 당사자들이 더 `잔혹`한 것이다.

`동화란 `자극`이 아니라 `보듬어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정리는 제가 동화작가가 된 지 10여 년이 지났을 때 비로소 갖게 된 신념이기도 합니다. 작금의 출판시장, 특히 아동문학은 `자극`의 시장입니다. 걸러내지 않는 사회문제, 흥미 위주의 생활, 그리고 학습을 앞세운 기획이 주류를 이룹니다. 이 속에서 순수 동화가 발붙이지 못해 밀려나고 있습니다. 귀중한 시간을 할애해 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결코 손해를 끼치는 글을 쓰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위 인용한 글은 `별사이다 한 병`이라는 동화책에 쓴 작가의 말이다. 단언하건대 50여 권의 동화책을 출간하면서 날것인 상태로 독자를 자극하는 글을 쓰지 않았다. 특히 `잔혹`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그것은 현실회피가 아니라 작가로서 글에 대한 양심과 독자에 대한 배려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단어의 개수는 대략 500개 정도라고 한다. 그것은 어휘에 맞게 단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할 때의 일이고 보통은 200여 개 정도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실정임에도 구태여 작가가 줄기차게 작품을 쓰고 또 독자들이 책을 찾는 이유란 무엇일까. 글을 쓴다고 해서 다 작가가 아니며 글이라고 해서 다 작품이 될 수 없다.

홍종의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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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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