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어린 독자들의 뭉텅이 편지를 받는다. 적게는 열 통, 많게는 삼십여 통이나 된다. 동화책을 읽고 그 동화를 지은 작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인데 삐뚤빼뚤 손 편지를 받으면 코끝이 찡하다. 물론 선생님이 시켜서 억지로 쓴 편지가 절반 이상이다. 선생님도 그것을 아는지 사전에 뭉뚱그려 한 통으로 답장을 해 달라는 요청을 한다. 그래도 나는 부득부득 개인별로 답장을 해 주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작가 선생님을 꼭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에요."

내 동화책을 읽은 아이가 나를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편지글 전체에 아이의 진정성이 담겨 있었다. 나는 당장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들을 만나러 가겠다고 날짜를 정하라고 보챘다. 거리상으로도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그런데 선생님의 반응이 의외로 시큰둥했다. 한참 만에 재능기부라면 모를까 예산이 없어 강사료를 지불할 수 없다는 말을 조심스레 꺼내는 것이었다. 강사료 예산이 없다는 말은 이해한다. 강사료를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재능기부`라는 단어에 순간적으로 아이들을 만나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내가 병적으로 `재능기부`라는 단어를 싫어하고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다. 근래에 들어 재능기부를 요구하는 전화가 부쩍 늘었다. 차라리 학교의 선생님처럼 강사료 예산이 없어 부득이 재능기부를 해 달라고 한다면 한번 고려를 해 보겠지만 그들은 가타부타 상황 설명도 없었다. 나아가 누구누구가 재능기부로 다녀갔다면서 사회 저명인사들의 이름을 들먹이고 숫제 요구의 수준을 넘어 고압적인 자세로 착취를 하겠다는 인상이 들게 했다. 실제 멋모르고 끌려가다시피 몇 번 강의를 간 적도 있는데 역시 수강자들의 손에는 테이크아웃 브랜드 커피가 들려 있었고 수강 태도가 가관이 아니었다. 내가 마치 그들로부터 재능기부를 받는 수혜자로 전락하는 기분이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한마디 더 하자면 자기네 기관에서 강의를 하는 것이 강사의 신분을 높이고 작품 홍보효과까지 있다는 말에는 화가 치밀어 오르기까지 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정부의 예산 지원으로 운영하는 기관들이 대부분이었다.

재능기부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고 사회단체 또는 공공기관 등에 기부하여 사회에 공헌하는 제도이다. 재능기부 하면 떠오르는 용어가 프로 보노 퍼블리코(Pro Bono Publico)다. 미국변호사협회는 소속 변호사들에게 연간 50시간 이상 사회공헌활동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변호사를 쓸 여건이 되지 않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무료 변론이나 법률 상담을 해 주는 서비스다. 이렇게 지식이나 기술 또는 재능을 활용해 사회공헌활동을 하는 것을 프로 보노라고 하고 여기에 공익이라는 말을 더해 라틴어로 프로 보노 퍼블리코라고 한다.

위의 예처럼 안정적 경제활동이 확보된 상태에서 일정부분 공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본래 재능기부의 의미라면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재능기부란 변질이 되어도 한참 된 것이다. 특히 예술분야는 더하다. 미술이나 문학이나 또는 다른 분야나 안정적 경제활동이 보장된 예술분야가 있다던가. 그런데도 공익이라는 명목하에 강요되는 재능, 그 희생의 거부로 인한 지탄의 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예술가가 돈만 밝힌다는 것이다. 재능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 재능을 개발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재능 보유자도 최소한의 경비가 필요하다. 그것을 고려하고 안배하는 것이 수혜자의 예의다.

"유료강의도 아니고요 재능기부도 절대 아닙니다. 그냥 어린 독자가 나를 만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해서 가는 겁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다시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재능기부`가 아님을 강조했다. 그리고 출판사에서 얻어 놓은 홍보용 노트와 책갈피, 사인을 해 줄 엽서를 주섬주섬 챙겼다. 재능이라고 인정을 받지 않아도 좋고 작품 홍보가 되지 않아도 좋다. 적어도 손 편지를 보낸 아이들은 나와의 만남을 결코 `공짜`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홍종의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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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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