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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에 얽힌 현대과학의 성패

2014-11-21 기사
편집 2014-11-21 05:39:28
 강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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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리아의 씨앗 로버트 데소비츠 지음·정준호 옮김 후마니타스·336쪽·1만5000원

첨부사진1

열대 의학의 거장인 로버트 데소비치가 '인류의 천형'이라 불리는 대표 전염병 말라리아와 칼라아자를 소재로 인간과 사회와 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유의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한 필체, 전염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발견하기 위한 열대 학자들의 헌신, 열정, 시행착오 등에 대한 이야기, 전염병으로 고통 받는 소외지역과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 허황된 약속으로 천문학적인 프로젝트 연구비를 받으면서 정작 현상은 외면하는 연구자들과 관료에 대한 냉정한 비판들이 펼쳐진다.

이 책은 최근 에볼라 바이러스의 유행이 던진 질문, '우리는 전염병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전염병은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국경이라는 경계선은 인간이 만들어낸 정치적 환상일 뿐, 병원체가 국경을 넘는 데는 비자가 필요없다는 데소비츠의 말처럼 에볼라 바이러스는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어 왔다. 에볼라가 아프리카를 넘어 미국과 유럽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뒤에야 비로소 전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백신 개발에 속도가 붙게 되었듯이 애초에 말라리아 연구가 식민지 원주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식민 모국의 군인과 관료, 상인들을 위한 것이었듯이 전염병은 소외와 관련이 있다.

이책의 마지막은 수천 년간 인류를 괴롭힌 말라리아를 한방에 치료할 마법의 총알인 백신을 꿈꾸며, 천문학적 규모의 연구비를 받아 내고도 초라한 성과밖에 내지 못하면서 다시 마법의 총알을 약속하는 현대 과학계의 문제, 실험실 안의 학문에 행정 관료들이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제, 그 결과 반복해서 발생하는 연구비 유용 스캔들과 범죄, 그것을 향한 침묵과 열광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신기하게도 황우석 사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말라리아의 씨앗에서는 '그곳'의 현실은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말라리아는 열대 지역의 질병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고대로부터 유럽, 중앙아시아, 한반도 등 북부지역에도 크게 유행했다. 소현세자의 공식적인 사인은 말라리아, 즉 학질이었으며, 서정주는 어릴 적 학질에 걸렸던 기억으로 '내가 여름 학질에 여러 직 앓아 영 못쓰게 되면'이라는 시를 썼다. 정약용은 임신한 아내가 학질에 걸려 학질 쫓는 노래를 지었다.

학질은 조선 시대 내내 사회 내에 만연한 질병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개항 이후 들어온 외국인 의사들은 조선에서 가장 흔한 질병으로 학질을 꼽을 정도가 됐다. 일제 감정기 당시에도 1932년 경무국 조사에 따르면 말라리아 감염자가 조선인만 12만 7580명에 달한다. 1910-1920년대 추정 인구가 1600만 명 안팎임을 고려하면 전체 인구 100여명 중 한명은 계속 말라리아에 감염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인 로버트 데소비츠는 "우리는 말라리아는 곤충 매개성 질환의 자연사, 인간사,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을 좇으면서 때로는 위대하며 때로는 쩨쩨하며 때로는 타락하기도 한 과학자들의 모습을 살펴볼 것"이라고 전했다. 로버트 데소비츠 박사는 연구실뿐만 아니라 수십 년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인도 등 현장에서 경험을 쌓았으며, 열대 의학의 황금기부터 쇠퇴기까지 두루 겪은 학자다. 또한 그가 쓴 기생충 진단법 교과서는 뛰어난 유머감각으로 인기를 끌었다. 흥미진진한 강의를 통해 후배 및 제자를 이 분야로 이끌었다고 한다. 열대 의학의 거장이 들려주는 인간과 기생충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말라리아의 씨앗을 권한다. 강대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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