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철이 다니오니 제법 오래전의 일이 떠오른다. 도시에서 공부하는 언니에게 전해 줄 김치통을 버스에 싣고 가던 중에 김치 국물이 새어 나와 뭇 사람들의 눈총과 그로 인한 상처를 받았던 기억이다. 지금은 추억이 된 김치와 관련된 일화는 김치 없이 못 사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맛이나 영양분을 넘어 다양한 의미와 상징을 가진 김치와 우리의 김장문화가 작년 2월에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한국인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김장김치가 필요했기에 예로부터 김치를 '반식량'이라고 일컬어 왔다. 김장철은 두 달 남짓이지만 집집마다 맛있는 김치를 담그기 위해 재료 준비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인다. 김장하는 날의 날씨와 저장하는 온도가 김치의 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날씨 보도를 주의 깊게 살피는 일도 중요하다. 이 밖에도 김장을 어느 정도 할지, 누가 참여할지, 누구에게 얼마나 나눠 줘야 할지를 결정한다. 정부에서는 배추와 무 등 김장재료의 원활한 공급과 가격에 비상한 관심을 쏟는 등 김장철이 되면 한국 사회 전반의 관심이 온통 김장에 집중된다. 이처럼 공동체에게 김장은 매우 소중한 사회적 관습이 아닐 수 없다. 예전에 김장은 이웃 간의 품앗이로 이루어졌다. 각 집안마다 김장하는 날을 정하고, 이에 맞추어 여성들이 함께 모여 김치를 담갔다. 이로써 품앗이를 하는 여성들 간에 김장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주고받는다. 김장을 한 다음에는 반드시 이웃끼리 김치를 나눠서 맛본다. 김장에 동참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고 품평의 시간이다. 이처럼 김장을 통해 여성들은 맛있는 김치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전통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고 어울려 사는 '정'을 나누게 된다.

오늘날 가정뿐만 아니라 회사, 학교, 부녀자 모임 등 다양한 사회문화 공동체에서 김장하는 모습은 한국 사회에서 매우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지역과 가정에 따라 김치가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재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김장한 김치를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다양한 행사도 쉽게 만날 수 있다. 김치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문화적 요소임이 분명하다. 최근에는 국외에서도 재외동포들을 중심으로 김장문화의 의미가 확산되고 있다. 이제 한국인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함께 김장문화에 내재해 있는 나눔의 문화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황경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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