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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문물 유입 중심지 내포… 한국 천주교의 싹 움트다

2014-03-12기사 편집 2014-03-12 06:2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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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의 천주교 성지를 찾아]1 당진 솔뫼·신리성지

첨부사진1교황 방문지로 예정된 충남 당진시 솔뫼성지의 김대건 신부 생가 전경. 솔뫼성지는 우리나라 최초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다. 김석모 기자

세계 12억 명의 천주교인들이 충남을 주목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는 8월 열리는 '2014 아시아-한국 청년대회(A-KYD)'를 맞아 충남 곳곳의 천주교 성지를 방문한다는 소식 때문이다. 충남 내포 일원은 서구 문물의 유입이 가장 활발했던 당진을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 역사의 시작점으로 불린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사도인 이존창이 내포(內浦)에서 활동했고, 조선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세례명 안드레아)가 당진에서 태어났다. 또 그 무게 만큼 절절한 순교의 역사가 충남 곳곳에 남아있다. 천주교 대전교구가 관리하는 성지는 모두 17곳에 달한다. 국내외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 코스도 밀집돼 있다. 대전일보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에 앞서 충청지역의 대표적인 가톨릭 성지와 인물을 조명한다.



솔뫼성지… '신앙의 못자리' 라 불리는 김대건 신부 탄생지

◇솔뫼성지, 천주교를 잉태하다=충남 당진에는 유난히 소나무가 우거진 곳이 있다. 바로 우강면 송산리의 '솔뫼'다. 솔뫼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솔뫼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이곳은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세례명 비오)가 50세에 영세한 뒤로 천주교 마을이 된 곳이다. 김진후는 면천군수로 재직 할 때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에게 복음을 전해듣고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정조 15년인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돼 해미감옥에서 10년의 옥살이 끝에 순교했다.

2년 뒤에는 셋째 아들 김한현이 순교했고, 23년 뒤에는 손자 김제준이, 또 7년 뒤에는 김제준의 아들 김대건이 순교함으로써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냈다. 솔뫼가 '신앙의 못자리'로 불리게 된 이유다.

솔뫼는 지난 1946년 김대건의 순교 100주년을 맞아 후손들이 소나무가 우거진 뒷동산과 집터 4600평을 매입했고, 대전교구가 1976년 성역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해 이듬해 김대건 신부의 동상과 기념탑을 건립하면서 명실상부한 한국 천주교의 중심지가 됐다. 당진시와 천주교 대전교구는 지난 2004년 솔뫼성지에 김대건 신부의 생가를 복원했고, 2005년 기념관을 건립했다.

◇김대건, 조선의 1호 신부가 되다=솔뫼성지가 자리한 충남 내포 일원은 일찌감치 외국 문물의 유입이 활발했던 곳이다. 중국과 바닷길로 통하는 곳이어서 일찌감치 서학이 들어왔다. 자연히 실학자들을 많이 배출했고, 한국 교회의 초기 신앙 공동체가 발전했다. 김대건은 이런 지리적, 사회적, 역사·문화적 배경 속에서 천주교인으로 성장했고, 1836년 프랑스 모방(P.Maubant)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신학생활을 시작한다.

마카오로 건너가 신학과 서양학문, 프랑스어, 라틴어, 중국어를 배웠고, 1845년 중국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돼 조선 최초의 신부로 미사를 집전한다. 물론 시련은 혹독했다. 국내 전도와 신도 격려를 위해 입국한 김대건 신부는 1864년 백령도 부근에서 선교사 입국을 위한 비밀항로 개설을 답사하던 중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고, 서울 새남터에서 목을 베 군문에 매다는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김 신부의 가계는 한국 가톨릭의 순교의 역사다. 증조부 김진후와 종조부 김한현, 부친인 김제준, 모친인 고 우르슬라가 모두 순교했다.



신리성지… 실질적 조선교구청 역할 담당했던 역사적 장소

◇신리성지, 한국 천주교를 기록하다=당진 합덕읍의 신리성지는 조선천주교의 요람이자 기록관이다. 신리성지의 위상은 조선 제 5대 교구장인 성 마리 니콜라 앙토안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세례명 안토니오·한국명 안돈이·사진) 주교와 관계가 깊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해 충북 제천 배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는 등 천주교 전파에 힘쓴 인물이다. 그가 사목 거점으로 삼은 신리 공소(단위교회)는 병인박해 때 오메트르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체포된 곳으로 '조선의 카타콤베(Catacombe·지하 묘지 신앙처)'로 불린다. 다블뤼 주교가 제5대 조선교구장이므로 실질적인 조선교구청인 셈이다.

다블뤼 주교는 신리성지에서 10여 년 동안 은거하며 성사를 집전했다. 그는 이곳에서 세계 천주교사에 길이 남을 자료를 만들어 냈다. 바로 조선 초기 교회의 상황과 순교자 150여 명에 대한 기록이다. 다블뤼 주교는 이 기록을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냈고, 자료들은 한국 천주교 순교사의 토대가 된 '다블뤼의 비망기'로 간행됐다. 비망기는 훗날 103위 성인, 124복자 탄생의 이론적 근거자료가 됐다. 다블뤼 주교는 1866년 내포에서 체포돼 참수됐으며 지난 1988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행사 때 방한한 요한 바오로2세에 의해 시성(諡聖)됐다. 그의 절친인 작곡가 구노가 다블뤼 주교와 조선 순교자들을 위해 쓴 곡이 '아베 마리아'다. 신리성지의 초가집은 성인으로 시성된 손자선(세례명 토마스)의 집으로 주교관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박해 이후 소유주가 여러 차례 바뀌고, 구조가 변경됐다. 1964년에는 본당 중심의 사목이 강화되면서 방치되는 등 흔적 조차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지난 2004년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됐다. 충남도와 당진시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주목해 '신리 공소' 주변의 성역화에 총 33억 원(도비 10억·시비 10억·자담 13억)을 투입하고, 올해 다블뤼 주교 기념관(지하 2층·지상 2층)을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해 왔다. 또 오는 5월 6일 다블뤼 주교 시성 30주년 기념일과 다블뤼 주교 기념관 축복식(개소식)을 맞아 프랑스 아미앙(Amiens)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다블뤼 주교가 순교 당시에 입었던 옷과 용품, 중백의(주교가 전례 집행 시 입는 옷) 등 30여 점을 기증할 예정이다. 글·사진=권성하·김석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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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2제5대 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10여년간 머무르며 실질적인 조선교구청 역할을 했던 당진시 합덕읍 신리1길 61-23에 위치한 신리성지내 가옥. 김석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