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 천주교 성지를 찾아 7 제천 배론성지

황사영 동상   이상진 기자
황사영 동상 이상진 기자
`우리는 죽어 없어질 것 들이나 우리 자신을 위해 열망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신부 6번째 친필서한 중)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가 잠들어 있는 곳 제천 배론 성지는 충청북도기념물 제118호로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이자 황사영백서의 산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 성요셉 신학당이 있던 곳, 천주교신자들이 살던 신앙촌 등 한국 천주교 발전과정에서 길이 빛날 역사적 사건과 유적을 간직한 뜻 깊은 곳이다.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배론이란 이름은 구학산과 백운산 사이의 계곡이 배의 밑바닥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서산과 당진, 홍성, 예산 등 당시 서구 문물의 유입이 활발해 천주교가 일찍 전파됐던 충남 내포(內浦)지방 신자들이 1791년 신해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 들어 농사를 짓고 옹기를 구워 생활하며 신앙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순교자의 굳건한 믿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땀의 순교자`. 우리나라 두번째 천주교 사제 최양업 신부를 이르는 말이다. 그는 1836년 김대건·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유학, 신학을 공부했으며 1849년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함께 떠났던 김대건보다 4년 뒤였다. 그해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전라도부터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1850년 6개월 동안 5개도 5000리를 순회하며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신자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고 하루 80리에서 100리를 발이 닳도록 걸었으며 밤에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 다른 공소로 떠났다고 한다. 한 달 동안 나흘 밤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서 성사집전을 끝낸 그는 주교에게 보고 차 한양으로 올라가던 중 1861년 6월 경북 문경에서 쓰러져 보름 만에 사망했다. 장례식은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요셉 신학당에서 장엄하게 거행됐다고 한다. 그의 묘소는 배론성지 뒷산에 있다. 입구에는 석상이 세워져 있고 건너편 언덕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성직자 묘소가 조성돼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후배 사제들이 함께 잠들어 있다.

그의 성덕을 기리며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배론 대성당이 건립됐다. 배 모양으로 설계 시공되었으며 그 이유는 배론이라는 지명을 조형화했고, 교회를 구원의 배로 이해하고 표현, 사람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고자 했으며 그가 유학 후 입국하기 위해 몇 차례 승선했던 그 배를 상기하여 그분이 지니셨던 불굴의 선교의지를 본받고자 하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그의 출생지는 순교한 천주교 무명 교도들의 줄무덤이 있는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로 청양군이 오는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때 방문을 청원 성사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배론 성지는 또 황사영백서의 산실로도 유명하다. 1801년 신유박해때 천주교 신자들이 핍박을 피해 숨어 들었다. 지금은 진입하는 길이 좋아졌지만 당시는 심산유곡이어서 숨어 살면 찾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황사영도 이때 이곳으로 들어왔다. 상주 차림으로 위장하고 도점촌 으로 몰래 들어온 뒤 이곳에서 옹기 굽던 신자 김귀동의 집 뒤뜰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에 은신, 8개월 동안 생활하면서 북경의 주교에게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 사실과 신앙의 자유, 교회의 재건 방안을 호소하는 백서를 썼다. 가로 62㎝, 세로 약 39㎝의 흰 명주에 122행 1만3384자의 한자로 깨알같이 기록한 이 장문의 편지는 전달되지 못하고 발각됐다.

특히 이 백서에 종교를 위해 조선을 청나라에 편입 시키고 서양 군대를 조선에 출정케 하자는 내용이 담기면서 종교를 위해 조국까지 배반하는 글로 돼 파문이 커졌고 황사영이 능지처참 당하는 등 16명이 순교했다. 황사영이 백서를 썼던 토굴은 역사에 묻힐 뻔 했으나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쓴 저서를 토대로 한국가톨릭계와 제천시가 지난 1976년 찾아냈고 1988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황사영 토굴 앞에는 초가집 한 채가 놓여 있다. 배론 신학교이다. 1855년 프랑스 신부들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가톨릭 신학교 `성요셉신학당`을 복원한 것이다. 배론 공소회장 장주기(張周基)의 집에 문을 연 이 신학당 책임자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였으며 20여 명의 신학생이 공부했다. 1866년 병인박해로 두 신부와 학생들이 순교하며 문을 닫았다. 이 신학당 건물은 1950년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소실됐는데 2003년 초가로 복원하면서 10m 옆으로 옮겨 지었다. 현재 이름은 배론 신학교. 방 안에는 한복을 입고 성경을 공부하는 신학생들의 모습이 재현돼 있고 원래 자리엔 신학당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배론성지 조성사업은 1972년 `개발10주년계획`을 수립한 뒤 1976년 원주교구가 성지개발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본격화됐다. 황사영 현양탑과 최양업 신부 석상 등이 세워졌고 또 피정과 교육을 위한 `순교자들의 집`과 `십자가의 길` `성모동산` 등이 이곳을 찾는 신자들을 맞고 있다.

남을 위해 내 것을 내주고, 희생과 사랑으로 남을 대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사람들은 성지를 찾아 성인들을 본받고자 기도하며 그들의 사랑을 배운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 사건과 유적을 간직 굳건한 믿음을 느끼는 곳 배론성지는 욕심으로 가득했던 가슴에 편안함이 깃들어 마음 다스리기에 더없이 좋은 순례지이다.

제천=이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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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교 발전과정에서 길이 빛날 역사적 사건과 유적을 간직한 뜻 깊은 곳이다. 국내 첫 신학교 성 요셉 신학당(현 배론 신학교) 황사영 동상   이상진 기자
제천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교 발전과정에서 길이 빛날 역사적 사건과 유적을 간직한 뜻 깊은 곳이다. 국내 첫 신학교 성 요셉 신학당(현 배론 신학교) 황사영 동상 이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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