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당시 조선왕실에 대한 일본의 통제와 영친왕이 처해 있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몇 가지 의문점을 가지게 된다. 그 당시 영친왕은 명목상 왕실의 대표였을 뿐 실제로는 일본군 장교 신분으로 일본에 거주하고 있어서 영친왕의 모든 행적은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관리 하에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영친왕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서 부왕에 해당하는 순종의 국장(1926년 6월 10일)에도 일본 정부가 승인하지 않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영친왕은 일본 정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어떠한 결정권도 없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설령 영친왕이 건설 자금 2만 엔을 보조할 정도의 힘과 결정권이 있었다고 해도 영친왕 모후의 무덤이 있던 곳을 파헤치며 골프장을 짓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은 당시 유교사상에도 맞지 않는 일인 것이다. 또한 군자리 골프코스가 개장된 1930년은 영친왕이 32세로 일본군 연대장으로 부임하여 일본과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감시 하에 있었기 때문에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시기였으며, 이러한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에 대해 영친왕의 부인인 이방자(李方子) 여사는 '국민이 말할 수 없는 탄압 속에 사는데 내가 골프로 세월을 보낼 수 있겠는가'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영친왕이 골프장 건설과 관련된 부지 사용 허가와 건설 및 유지자금의 지원에 대한 내용들은 경술치국 10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재평가해 보아야 할 우리의 슬픈 역사일 것이다. 이렇게 군자리 골프장은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시대적 아픔을 가진 당시 최신의 골프장이었다. 그러나 현대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골프와 큰 차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1930년 초반까지도 골프가 조선인들에게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못한 그들만의 스포츠였던 것이다. 호서대 골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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