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골프구락부는 청량리골프장 시대를 마감하고 군자리로 이전하기 위하여 당시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군자리의 30만평 부지에 1927년 6월 11일 골프장 건설 공사를 시작해 1930년 6월 22일 개장하였다. 이곳은 6개 이(里)가 포함된 넓은 지역으로 이 일대는 1880년대부터 말(馬)과 양(羊)을 기르던 곳이기도 했으며, 조선 27대 임금 순종(1874-1926)의 비(妃) 순명황후(1872-1904)의 능이었던 유강원(裕康園)(유능(裕陵))이 1926년까지 있던 곳이었다. 군자리 골프장 역시 경성의 이전 골프장 개발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왜 매번 골프장 이전지가 조선왕실 소유지이고 왕실의 묘가 있던 곳으로만 이전되었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시 왕위를 계승한 영친왕이 부지의 사용을 허락하고, 골프장 개발비와 3년간의 유지비까지 하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조선왕실에 대한 일본의 통제와 영친왕이 처해 있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몇 가지 의문점을 가지게 된다. 그 당시 영친왕은 명목상 왕실의 대표였을 뿐 실제로는 일본군 장교 신분으로 일본에 거주하고 있어서 영친왕의 모든 행적은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관리 하에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영친왕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서 부왕에 해당하는 순종의 국장(1926년 6월 10일)에도 일본 정부가 승인하지 않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영친왕은 일본 정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어떠한 결정권도 없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설령 영친왕이 건설 자금 2만 엔을 보조할 정도의 힘과 결정권이 있었다고 해도 영친왕 모후의 무덤이 있던 곳을 파헤치며 골프장을 짓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은 당시 유교사상에도 맞지 않는 일인 것이다. 또한 군자리 골프코스가 개장된 1930년은 영친왕이 32세로 일본군 연대장으로 부임하여 일본과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감시 하에 있었기 때문에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시기였으며, 이러한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에 대해 영친왕의 부인인 이방자(李方子) 여사는 '국민이 말할 수 없는 탄압 속에 사는데 내가 골프로 세월을 보낼 수 있겠는가'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영친왕이 골프장 건설과 관련된 부지 사용 허가와 건설 및 유지자금의 지원에 대한 내용들은 경술치국 10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재평가해 보아야 할 우리의 슬픈 역사일 것이다. 이렇게 군자리 골프장은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시대적 아픔을 가진 당시 최신의 골프장이었다. 그러나 현대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골프와 큰 차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1930년 초반까지도 골프가 조선인들에게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못한 그들만의 스포츠였던 것이다. 호서대 골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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