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설원 위를 꾹꾹 발도장을 찍으며 걸어가면 마치 판타지 영화 속 겨울 세상에 홀로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때론 새로운 길을 가는 '첫'사람이 된 양 자부심이 생기기도 한다. 고요한 밤, 소리 없이 차곡차곡 내려 쌓여 세상에서 만들어진 온갖 소음조차 덮어 버리는 은빛의 뽀얀 눈. 이 하얀 세상이 주는 평온과 고요함은 단지 혼자만의 착각일까?

눈이 쌓인 아침은 평소보다 어쩐지 조용한 것 같다. 기분 탓이려니 하고 넘기기에는 '왜 항상?'이라는 의문이 발목을 잡는다. 눈 덮인 세상의 고요함. 그 비밀은 바로 눈을 내리게 한 찬 공기와 육각형의 결정이라는 사실!

우리 귀까지 소리가 들리게 하는 음파는 기온에 따라 전달 속도의 차이가 생기는데, 0도에서는 약 331m/s로 전달되다가, 기온이 1도씩 낮아질 때마다 약 0.6m/s씩 느려진다. 따라서 눈이 오는 날에는 기온이 영하권으로 낮은 경우가 많으므로 음파의 속도가 떨어지게 되어 작은 소리들이 멀리 전달되지 못하게 된다.

아름다운 육각의 눈 결정 또한 소리를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

육각형의 결정이 모여 눈송이를 이루고, 이 눈송이들은 차곡차곡 쌓여 마치 이불처럼 세상을 뒤덮는다.

보기에는 평평하게 쌓여 있는 눈 같지만 사실 송이송이 이루어진 눈 입자 사이에는 많은 틈을 가지고 있어 방음벽과 같이 소리를 흡수하게 된다. 눈의 소리 차단 효과는 유리솜과 같은 수준일 만큼 뛰어난데, 특히, 600Hz 이상 소리의 80% 정도를 흡수한다고 한다. 따라서 자동차나 집 지붕 위에 두껍게 쌓인 눈이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여 평소보다 조용하고 아늑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또한 눈 입자의 많은 틈은 스펀지처럼 찬 기운을 빨아들여 기온마저도 올리는데, 주위 공기 중에 있는 작은 물방울이 눈과 함께 얼어붙으면서 다시 열을 방출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순수의 색으로 색칠해 마음을 정화하고, 조용한 설경에 쉼표 하나의 여유를 선사하는 눈. 온갖 소리와 냉기마저 품는 포근하고 고요한 그 황홀경이 그리워진다. 다만 도로 위 눈은 해 뜨기 전 서둘러 녹아 오가는 이의 눈총 받는 애물단지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서애숙<대전지방기상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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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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