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향대 대우교수 언론인

민주주의 원론으로 보자면 입헌군주제는 일종의 모순이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에서 왕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영국이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최근의 보도를 보면 영국인의 66%가 왕실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을 빼고는 못 하는 것이 없다는 영국의회가 1년에 한 번은 꼭 왕을 모시고 국정연설을 듣는다.

그날은 상하 양원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왕을 모셔다가 단상에 앉히고 왕년의 신하들이 그러했듯이, 경건한 자세로 국왕의 교시를 경청한다. 노동당 같은 곳에서 과격파들이 집단 불참한다거나 중도 퇴장하는 등 소란을 피우거나 김을 빼는 사고를 낼 만도 한데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아직 그런 얘기를 듣지 못했다. 만약 노동당이나 좌파정당들이 국왕의 국회 출입을 막고 군주제를 결사반대한다면 영국의 입헌군주제는 여야의 최대 정쟁거리가 될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우리나라는 많이 다르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1945년 해방 전까지는 군주제하에서 살았다. 1910년까지는 조선왕조에서, 그후 해방 전까지는 일본 천황체제하에서 살았다. 1948년 독립과 더불어 우리나라 국민들은 군주제를 단호히 거부했다. 군주제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조선의 이씨왕조가 부활할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 국민들은 당쟁과 권력투쟁, 탐관오리의 가렴주구 등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결국 일본에 먹히는 수모를 당했던 이씨왕조에 대해 원한이 컸던 것이다. 이씨 왕들이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면 약간의 왕정복귀 운동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 망국으로 이어졌던 통치권자들의 분열과 무능과 부패에 진저리가 났던 것이다. 결국 아무런 의문이나 주저함이 없이 군주체제 대신 자유민주주의 공화체제를 선택한 것이다.

입헌군주제와 자유민주주의 공화체제 중 어느 것이 좋은가는 속단하기 어렵다. 입헌군주제는 모순적이면서도 인간사회의 현상적 모순을 적절히 반영한 현실적 제도라고 볼 수도 있다. 즉 자유도 필요하지만 권위와 질서도 필요한 것이 인간사회의 현실이다. 인간의 속성상, 자유는 틈만 나면 방종으로 흐르기 쉽다. 그것을 잡아주는 전통적 가치관과 권위는 여전히 필요한 것이라고 볼 때, 인간사회에는 어떤 권위적 존재가 자리할 공간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유럽의 경우를 보면 입헌군주제 국가 중 괜찮은 나라들이 꽤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영국을 비롯,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벨기에 등이 왕을 모시고 산다. 다 수준이 높은 나라들이다.

결국 그 나라의 역사적 배경 등 특수성이 그 체제를 결정하는 것이므로 무턱대고 비판할 일이 아니다. 미국은 영국인들이 건너가 세운 나라지만 군주제를 채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입헌군주제인 영국으로부터 압제를 받다가 독립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군주제는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경우다.

문제는 그런 체제들을 얼마나 잘 지탱시켜 나가는지가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체제 유지가 잘못되면 국민만 불행해진다. 배가 심하게 흔들리면 가장 고통을 받는 것은 꼼짝없이 그 배를 타야 했던 사람들이다. 너무 심하게 흔들리면 배가 뒤집힌다.

요즘 여야의 이전투구나 국정원사건 등을 보면, 이들이 과연 체제 유지에 대한 의식과 능력이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지금 대한민국의 체제 안에서 권력과 영화를 누리고 있지만, 만약 그들의 무분별한 정쟁과 직무유기로 체제가 난파한다면 그 수난과 피해는 누구에게 가는가. 이쯤 되면 그들도 더 이상 누리기는 힘들겠지만, 진정으로 불쌍한 것은 권력도 영화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한 대다수의 국민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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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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