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주(1979~)

- 파이프오르간 / 성은주(1979~)

흑백영화처럼 거리를 두고 싶다

당신이 무슨 색을 지녔는지 기억나지 않아도 좋다

소리의 신경계를 넘기듯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렸다가

파이프 속에서 어둡게

서로의 볼을 비벼주면서 불쑥 입을 연다

종종 철자를 틀리게 쓰거나 발음을 다르게 하면서

우린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는 건반 연습을 한다

가끔 직설법이 필요했다

아랫입술을 깨물면 바람이 분다

소리의 균열에 따라 반갑지 않은 기호가 들어오면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이 만져진다

깊은 해저에서 길 잃은 자갈의 피부 결을 닮았다

오래된 크리스마스 멜로디 카드에서 빠져나오는 음표를 닮았다

모두 다른 옥타브로 소리를 내고 있다

이름 없는 무늬를 읽어 내리는 동안

손톱을 깨물며 두리번거려도 푸른 멍이 사라지지 않는다

가끔 이름이 바람에 날아간 경우를 봤다

----------------------

파이프오르간은 흔히 악기의 왕이라 불려진다. 별명처럼 20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외형이나 그 소리도 매우 웅장하다. 또한 오케스트라의 모든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로, 부드럽고 은은한 플루트 소리에서부터 맑고 높은 현악기, 트럼펫 등의 우렁찬 관악기, 또한 오르간 고유의 건반악기 소리까지, 서로 다른 크기의 관들이 소리들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J.S. 바흐는 이런 악기를 두고 "적절한 때에 적적한 음반을 누르기만 하면 악기가 스스로 연주한다"고 한 바 있다.

사랑을 연주할 때 우리들의 감정도 파이프오르간의 이런 특성을 닮았다. 어떤 크기의 마음 관을 지나느냐에 따라서 상대방에 대해 받아들이는 감정의 색깔이 달라진다. 깊이가 달라진다. 감정의 음색이 화음을 만들며 어울릴 때는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다가도, 상대의 "틀"리거나 "다"른 음색을 만나게 되면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는" 상황으로 변해버린다. 이렇게 둘이 만들어가는 사랑의 음악은 종종 다음 마디로 넘어가지 못한 채 끝이 나기도 한다. 이따금 아프게 덧나는 상처("균열")를 통해 과거의 악장으로 넘어간 사랑을 떠올려보면, "다른 옥타브로 소리를 내고 있는" 서로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때 상대에 맞춰 적절한 음반을 눌렀더라면, 하면서 후회를 한다. 하지만 마음 안쪽에 자리 잡은 "푸른 멍"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사람 "이름이 바람에 날아"갔을지라도.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