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경부장관 UN환경계획 한국부총재

전직 국회의장, 국무총리, 여야 정당 대표를 지낸 원로정치인들 17명이 나서서 임기 4년 중임(重任)의 분권형(分權形) 대통령제로 헌법을 개정하자고 주장하였다. 5년 단임제의 폐단도 이제 알았고 시대도 바뀌었으니 헌법을 다시 한 번 바꿔 보자는 데에는 물론 큰 이의가 없다.

그러나 다른 것 다 제쳐 놓고 대통령제를 분권형으로 하자는 데에는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직까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인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같은 서유럽의 여러 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나라의 최고 권력을 국가수반과 정부수반으로 분리·독립시켜 쌍두체제(雙頭體制)로 국가를 운영하는 체제 말이다.

이 체제에서는 대체적으로 대통령은 외치(外治)를 맡고 국무총리는 내치(內治)를 총괄한다. 직선이나 국회의 간선(間選)으로 선출된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임명하고 총리는 국회의 인준을 받아 국정 전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정부를 이끌어 간다.

총리가 국정책임을 지기 때문에 대통령은 국회의 신임과는 관계없이 초당적인 위치에서 자신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으나 총리는 의회의 신임을 받지 못하면 내각이 해산되는 내각책임제로 운영된다. 어쩌면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의 병합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이원집정부제(二元執政府制)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현재까지의 우리나라 대통령이 제왕적 위치에서 통치해 왔다는 점에 대한 반성에서 제기된 개헌론이라 하겠다.

제왕적 대통령제(imperial presidency)를 기피하려는 심정과 그에 대한 대안으로 분권형 대통령제를 주장하는 충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현실적인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는 헤겔적인 명제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통령의 권력분점이 우리나라에서 과연 현실적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어서다. 현실적이지 못하다면 이상적일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중심체제에서는 삼권분립의 원리에 따른 견제와 균형이라는 절묘한 지렛대 장치가 있어 체제의 민주적 유지가 가능하지만 대통령과 총리 간의 권력분점에도 과연 이러한 견제와 균형을 이룰 장치를 마련할 수 있을는지 대단히 의문스럽다. 대통령은 외교 안보 통일 분야를 책임지고, 여타 모든 분야는 국무총리가 맡는다고 했을 때 대통령과 총리 간의 갈등을 조절하는 장치로는 어떤 것이 가능할까가 걱정인 것이다.

예를 들면 예산과 인사에 관한 갈등과 당내 역학관계에서의 갈등과 정당갈등 같은 것들이다. 대통령과 총리가 예산권이나 인사권을 독립적으로 나누어 가질 경우 행정이 과연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가 있을까도 의심스럽다. 여기에 정치적 성향이나 입지가 다른 지도자가 대통령과 총리를 맡게 되는 사태가 온다면 이는 어쩌면 나라에 치명적인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이는 과거 프랑스가 경험했던 일들이다.

한 나라의 정치체제는 어떤 경우에도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의 산물이다. 프랑스 정치체제는 프랑스라는 나라의 역사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고 미국의 대통령 중심체제 역시 세계 최초의 신생국이었다는 역사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인간이 스스로의 과거로부터 도피할 수 없듯이 어떤 정치체제도 역사나 전통을 무시하고 존립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정치적 속성이 파벌에서 해방된 적이 없었다는 점을 무엇보다 먼저 고려하고 나서야 비로소 분권형 대통령제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의 정당사는 곧 파벌사(派閥史)라고 해도 좋을 듯싶은 생각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선진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에는 정당의 생성 발전 몰락의 주기(週期)나 빈도가 빠르고 가파르다. 그 과정에서 파벌이 작동되지 않은 경우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파벌에 관한 한 역사의 기억 속에서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악몽을 지니고 있다. 4·19직후에 있었던 집권 민주당의 신·구파 대립이 그것이다. 그 극한 대립은 여야 정당의 통상적인 적대적 경쟁관계를 뛰어넘는 이전투구(泥田鬪狗)였고 가히 혈투였다. 분권형 대통령제를 채택한다고 가정했을 때에 파벌싸움에 여념이 없을 정치권의 앞날이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대선을 코앞에 둔 이 시점에도 일부 정치인은 정치원로들의 주장에 편승하여 소속정당의 집권보다는 파벌적 이익을 위해 분권형을 주장하고 있지나 않은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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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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