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번치 (1969년 作)/샘 페킨파 감독

드라마 '타짜' 작가·한국방송작가협회 정회원

폭력미학의 거장, 폭력의 피카소, 피칠갑 영화의 원조, 오우삼과 타란티노, 그리고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적 스승, 이 많은 수식어를 떠올리게 하는 단 한명의 영화감독, 바로 샘 페킨파다.

샘 페킨파는 '겟어웨이','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와라','철십자 훈장','관계의 종말' 등의 영화들을 통해 자신만의 스토리와 영상세계를 구축한 거장으로 그가 즐겨 쓰던 화면구성과 액션연출 기법은 타란티노와 80년대 홍콩 누아르, 그리고 그 시기의 홍콩을 대표하던 영화감독인 오우삼에 의해 계승된다.

특히나 영화 '와일드 번치'는 샘 페킨파에게 폭력미학의 창시자라는 칭호를 얻게 해준 영화로, 이후의 액션과 누아르를 포함한 이른바 '마초장르'의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영화이자 서부영화의 종말을 고한 서부영화다.

1913년, 미국 텍사스 주 변방의 작은 마을, 아이들이 장난삼아 전갈을 개미떼에게 먹이로 준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개미떼 위에 불까지 지르며 장난을 친다. 아이들에게 붙여지기엔 충격적이고 과도한 이미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영화를 통해 아이와 여자를 혐오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행동을 통해 불길함의 징조를 조성하고 '와일드 번치'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인간본성에 대한 회의감을 전달시킨다.

충격적인 오프닝을 뒤로 한 채 영화는 이 마을의 은행에 있는 막대한 양의 은을 노리고 군복으로 위장한 파이크 일당을 보여준다. 무리는 사는 일의 피로에 찌들어 있으며 그들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잠복해있던 추적대와 요란한 총격전을 벌이고는 도망쳐 그들의 수확물을 살피지만 금화나 은화로 차있어야 할 자루에는 쇳조각만 가득하다.

이전에는 동료였던 손튼은 추적대에 고용되어 친구들의 행방을 추적해야하는 신세가 된다. 무법자들을 체포하지 못하면 감옥에 도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협박에 그는 마지못해 추적대에 합류하지만 그 일행들은 굳게 단결했던 무법자들과 명확한 대조를 이룬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13년이다. 철도와 자동차가 일반화 된 시대이며 기관총과 전쟁에 사용될 비행기가 준비된 대량학살의 전초시대이다. 자본주의 시스템과 만난 폭력은 이미 거대화되었고 이에 편입되지 못한 무법자들은 폐물이 돼있다.

'와일드 번치'는 의리와 우정이란 덕목이 사라져가는 변화의 시점에서 그들만의 가치관을 고집스럽게 수호하다 자멸하는 로맨티스트들 이야기이며 저물어가는 낭만적 서부극의 황혼을 그리는 마지막 서부영화다.

'와일드 번치'에서 표현된 멕시코는 아름답고 조용하다. 공동체가 살아 있으며 삶에 지친 파이크 일행이 힐링하기에 더 없이 좋은 장소다. 무리는 의심할 여지없는 없는 우정의 울타리 안에서 고요하고 평화롭기만을 원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총을 들고 살인을 하게 만든다. 벌떡 일어나 '와일드 번치'의 세계로 나가라고 엉덩이를 걷어찬다.

무법자들은 친구를 잡아간 반란군 장군의 기지로 향한다. 동료를 죽인 장군과 부관을 사살한 그들에게 우박처럼 총탄이 퍼부어진다.

8대의 카메라를 동원해 촬영한 그유명한 '죽음의 광장' 총격전이 바로 이것이다.

유혈낭자한 영화들의 조상쯤으로 평가되는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는 그러나, 인용되어지는 것만큼의 유쾌하고 흥겨운 폭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지속적인 스톱모션과 슬로모션으로 완성된 폭력묘사는 죽음에 대한 사유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종말의 순간을 탐미적으로 묘사하는 서정적인 시적정취를 불러일으킨다.

오늘날의 폭력묘사를 중점에 둔 영화가 보여줄 수 없는 이 서정성이야말로 페킨파가 이룩한 폭력미학의 정수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정수에 바로 이 영화, '와일드 번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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