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궁 제작 명인 충남도지정 무형문화재 주장응씨

충남지정 무형문화재 주장응씨가 자신이 만든 활을 다듬고 있다.
충남지정 무형문화재 주장응씨가 자신이 만든 활을 다듬고 있다.
[연기]활은 우리 민족을 지켜준 무기다. 고구려 보장왕(서기 645년) 당시 중국 당 태종이 침범해왔을 때 양만춘 장군의 화살이 당 태종의 한쪽 눈을 멀게 해 당나라를 물리쳤다. 고구려벽화에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수렵도 장면에서 우리 민족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양만춘 장군의 활과 고구려 벽화의 활은 모두 각궁이다. 활은 철궁, 목궁, 죽궁 등 소재에 따라 분류가 되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위력이 강한 활이 바로 소 뿔과 심줄로 만든 각궁이다.

각궁은 길이 125㎝ 내외에 불과하지만, 사정거리가 수백 미터나 되며 사정거리가 1㎞에 달하는 것도 있다.

현재 궁을 제대로 만드는 사람이 전국적으로 손꼽을 만큼 적다. 이 가운데 연기군 전의면에서 38년째 각궁을 만들어 오는 주장응 씨가 지난해 10월 1일 충남지정 무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됐다.

천안에 살던 주장응 씨가 절은 시절 부천에 사는 누이 집을 방문했다가 누이의 시아버지인 각궁제작 명인 김장환(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47호·1984년 작고) 선생을 만났다.

주씨는 고 김장환 선생으로부터 활 쏘는 법과 활 만드는 법을 배우면서 활과 인연을 맺었다.

주씨가 본격적으로 활을 쏘고 활 만드는 수업을 시작한 것은 1975년부터. 2년간 주씨를 지켜본 김장환 선생은 주씨의 사람됨과 솜씨를 알아보고는 정식으로 제자로 삼고 각궁의 비결을 전수했다. 주씨는 아예 부천으로 거처를 옮겨 김장환 선생과 숙식하면서 6년간 활 만드는 법을 배웠다. 주씨는 1979년 처음으로 전국궁도대회에서 우승하고 이후 수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활을 만드는 일이 여름에는 한가하고 겨울철에는 바빴다. 특히 10월부터 이듬해 2월 말까지 5개월 동안은 활 쏠 시간도 없이 활 만드는 일에만 전념한다.

활은 단번에 만들어지는 아니라 농사처럼 꼬박 일년이 걸린다.

활 손잡이 아래와 윗부분을 ‘오금’이라 하는데 오금은 물이 오르지 않은 2월에 대나무를 채취해서 불에 구워 휜 것이다.

각궁의 손잡이를 ‘좀통’이라 하는데 좀통은 참나무를 물이 좋은 4-5월 중 베어서 만는다.

가장 덥고 습기가 많은 때인 8월에는 소뿔을 채취하고 9월에 틀을 짜서 다듬질한다.

10월에는 부각(뿔을 얇게 떠서 활대에 붙이는 것)을 한다.

12월부터 1월까지는 소 등심의 힘줄인 ‘심줄’을 놓는다. 이때는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오전에 일을 마친다. 2월 말까지 심줄을 민어 부레로 만든 풀로 수십 례 반복해서 붙이면 하나의 각궁이 탄생한다.

1979년 부인 최경숙(57세) 씨를 만나 당진에 살면서 잠시 식당을 하기도 했으나, 활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주씨가 활 만드는 일을 본업으로 삼은 것은 1982년부터다. 주씨는 “뜻밖에도 처음에 만든 활이 궁사들에게 인기가 좋았다”며 “아마 온 힘을 들여 만든 활이라서 그런 같았다”고 회상했다.

주씨의 활을 찾는 이가 점차 늘어나자 각궁 제작을 본업으로 삼기 위해 활터를 물색했다. 활을 쏘면서 활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주씨는 “연기군 전의면에 관운정이 있었는데, 경부선이 지나는 곳이라 전국에서 활을 보러 오기가 쉬워서 관운정 근처에 자리를 잡게 됐다”며 말했다.

주씨가 만드는 활이 전국의 궁사들에게 인기가 높다. 이유는 주씨가 만든 활이 전국대회에서 우승확률이 90%에 이르기 때문이다. 주씨가 만든 각궁은 ‘조치원 활’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지난해 10월 1일 충남무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받으면서부터 ‘연기각궁’으로 상표를 바꿨다. 연기각궁은 1년에 150여개 정도만 만들어지는데 65만원 선에 판매되고 있다.

주씨의 맥을 잇는 제자는 3명인데, 올해 말에는 주씨의 장남도 일을 도울 예정이다.

주씨는 “아들이 올해 28살인데, 대학원 공부를 마치면 제 뒤를 이어 활 만드는 일을 하기로 약속했다”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윤형권 기자 yhk@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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