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 명성은 인생을 살면서 수없이 넘어야할 첫 번째 고개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과정과 목표를 착각하거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지 못한다면 순간 반짝이다 이내 스러지고 만다. 주변에 그런 이들이 얼마든지 많다.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이들이 어떤 분야든 대략 95%라고 한다.
고암이 어렵사리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선생님’인 해강 김규진 문하에 들어가 전력투구해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이란 영광을 따냈다. 문학도가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가수지망생이 그토록 바라던 자신의 음반을 손에 쥐게 된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잠시였고 화가로서 첫발에 불과했다.
고암은 고려미술원의 연구원으로도 수학했다. 고려미술원은 1923년 9월 서울에서 창립된 전통화가와 서양화가들의 단체다. 처음에는 신미술운동을 목표로 박영래(朴榮萊)·정규익(丁奎益)·강진구(姜振九)·김석영(金奭永)·나혜석(羅蕙錫)·백남순(白南舜)·김명화(金明嬅) 등 신진 남녀 서양화가와 미술학도 10여명의 주동으로 고려미술회로 조직됐다.
대전일보사 daejonilb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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