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출신의 세계적인 거장 고암 이응노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술계와 학계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와함께 한국미술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고암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관리해야한다는 여론도 대두되고 있다.

27일 대전일보사를 방문한 고암의 미망인 박인경 여사(프랑스 거주)로부터 국내에서 고암에 대한 재평가 및 기념사업 등에 대한 소감, 생전의 고암에 대한 얘기를 들어왔다.<편집자 주>

대담:金在根 기획취재부장

-고향에서 고암선생을 다시 평가하고 여러 가지 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는 데 소감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고암선생이 작고하신 후 제 역할은 고암의 그림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힘들고도 어렵습니다. 이런 와중에 여러분들이 고암에 대한 관심을 갖고 도와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지난해 고암 고향 홍성의 미술인들이 고암을 기리기 위한 어린이미술제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고암 작품을 보내려 했지만 보관 전시장소가 마땅치 않다고 해서 그만둔 적이 있습니다.

-고암선생이 대전과 인연이 많다고 들었는데 어떤게 있나요.

▲50년대 후반에 대전문화원에서 전람회를 열었습니다. 동백림사건과 관련 대전교도소에서 1년반 정도 계셨고요. 고암선생은 생전에 옥중생활을 ‘학교생활’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옥중에서도 밥풀조각 등으로 알려진 작품을 상당히 제작하셨습니다. 교도소생활중 대전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고요. 대전에 계실 때 고향의 많은 지인들이 찾아왔다합니다. 복역중 수인가운데 머리를 깎지 않은 이는 고암선생이 유일했다고 합니다. 그 때 고암선생은 “내머리를 자르려거든 내목을 잘라라”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지난 99년 대전시립미술관에서 10주기 추모전을 열었고요.

-최근 고암선생의 생가나 수덕여관 등을 방문해 보셨나요.

▲몇해전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고암선생에게 생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생가를 찾아보니 제가 들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르더군요. 10주기때 파리에서 동양미술학교 제자들이 주축이 돼 추모전을 열었습니다. 제자들은 서울에서 전시회를 갖고 서울도 방문했습니다. 10여명의 제자들이 수덕여관도 가봤지요. 생전에 고암선생은 수덕여관에 놓인 돌조각은 수덕여관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암선생은 기와집으로 개량하지 말라는 부탁도 했다고 합니다. 개량하면 초가로 된 독특한 수덕여관이 없어질 것으로 내다본 것이지요. 고암선생의 예견이 맞아떨어졌어요. 돌조각이나 초가 덕분에 수덕여관이 문화재로 되고 계속 존재하도록 하게했습니다.

-고암선생은 우리 근현대미술사의 큰 자취를 남겼습니다. 고암의 많은 작품을 관리하는 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한곳에 모아 체계적으로 보관전시해야한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선생이 작고하신 후 저의 역할은 고암그림이 제자리를 찾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동안 작품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평론가들로부터 고암작품을 보지 못했다는 소리를 여러번 들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조그맣게 이응노미술관을 개관하게 됐습니다. 고암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보자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작품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은 자주 듣습니다. 고암은 작품을 화랑용·증정용·소장용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기준에 따라 작품수가 달라지겠지요. 체계적으로 관리돼야함은 물론입니다. 지금은 잠시 중단되기는 했지만 먼저 프랑스에서 이런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프랑스건 고국에서건 어떤 형태로든지 고암선생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시스템이 마련되길 희망합니다.

-프랑스에서의 생활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57년 미국 뉴욕월드하우스에 열린 현대한국미술전에 우리나라 여러작가들과 함께 출품했습니다. 여기에 출품된 ‘출범’ ‘산’이란 작품을 록펠러재단이 구입해 뉴욕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일이 있습니다. 고암선생은 여기서 세계로 진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합니다. 또 프랑스 평론가 라센느의 초대를 받기도 했구요. 그러나 당시 문교부에서 고암선생이 국전추천작가 초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프랑스로 가는 데 필요한 추천장을 발급해주지 않아 도불을 포기했습니다. 재정보증도 필요했는 데 고암선생은 왜 다른 나라사람들에게 재정보증을 해달라고 하느냐고 했습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것같습니다. 당시 주한독일대사의 도움으로 독일로 갔고 1년후에 다시 프랑스로 갔습니다.

-프랑스에서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파리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적이었습니다. 파리의 유명한 파케티화랑 소속 작가로 그 화랑에서 생활비를 대줬습니다. 다만 프랑스생활 초기에 한국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한국에서의 송금이 중단됐습니다. 그때 주변에서 도움을 요청해, 나눠쓰다보니 한때 정말 어려운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고암선생은 그 어려운 시기에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니 아이러니지요.

-박인경여사님은 고암선생과 평생을 함께한 예술 반려자이기도 합니다. 예술에 대한 의견을 자주 나눴겠습니다.

▲처음에는 고암선생이 무슨 작품을 하는 지 소상하게 알고 많은 얘기도 나눴지만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할 때에는 그러질 못했습니다. 콜라주에 몰두했을 당시 제가 한번 해봐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허락하더라구요. 그러나 금방 그만두라해요. 단순히 붙이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모양과 색 재질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콜라주 작품은 파리 화단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대전일보가 고암 탄생 100주년 특별시리즈를 연재하고 세계적인 작가 고암선생을 되찾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고암선생은 참 외로운 사람입니다. 아직까지도 외롭다고 생각합니다. 남달리 앞서나가면 뒤에서 잡아당기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외로웠고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고국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해서 외로웠습니다. 평소 고암선생은 “내가 프랑스 말도 잘하고 유명해지면 그림 그릴 시간을 빼앗겼을 것이다, 얼마나 다행이냐, 또 그림 값이 올라가면 거기에 얽매여 그림이 발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고 싶은 그림 마음대로 그린다, 자유롭다”라고 말했습니다. 스스로 외롭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유작을 정리하다보니 ‘독락(獨樂)’이란 제목의 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고암선생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대전일보의 취재 등은 고암선생의 외로움을 덜어주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 吳隆鎭·사진 柳昌和 기자>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