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식 ETRI ICT전략연구소 연구전문위원
신성식 ETRI ICT전략연구소 연구전문위원

프랑스 슈퍼마켓에 가면 물값보다도 싼 와인이 종종 보이는데, 십중팔구는 랑그독 와인이다. 지중해를 따라 높은 산맥을 등지고 바다를 접하고 있어, '유럽의 캘리포니아'로 불리는 랑그독(Languedoc) 지역은 프랑스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와인산지이다.

전체 포도밭 면적이 보르도 2배인 약 26만 ha에 달하며 프랑스 와인 생산의 1/3을 차지하지만, AOC 등급 와인은 10%뿐이고 하위 등급인 IGP(Indication Geographique Protegee, 보호된 지리적 표시) 뻬이독(Pays d'Oc)이 74%를 차지한다. 나머지 16%는 최하 테이블 와인 등급인 뱅드프랑스(Vin de France)이다.

IGP 뻬이독의 생산량은 65만 톤에 달하는데, 대략 호주 와인생산의 1/2, 미국 와인생산의 1/3에 달하는 막대한 물량이다. 1855년 파리-리용-마르세이유 철도가 개통되면서 저렴한 운송비로 마시기 쉬운 랑그독 가성비 와인이 파리 주변과 북부 유럽 국가로 빠르게 공급됐다. 생산량은 25년 만에 4배로 늘었다.

19세기 중후반 필록세라로 프랑스 전지역 포도밭이 황폐화됐을 때도 랑그독은 재빠르게 미국 대목으로 다른 지역보다 먼저 위기를 극복, 1900년경 프랑스 와인생산의 절반을 차지했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노동자와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군인에게 공급하는 값싼 저급와인을 생산하는 본거지로 전락했다. 1980년대에는 랑그독 와인의 과잉생산 문제를 지적하는 '와인 호수(Wine Lake)' 개념도 등장했다.

하지만 풍부한 일조량(연평균 316일)과 적은 강수량(686mm), 온화한 겨울과 덥고 건조한 여름은 훌륭한 포도 재배에 적합해, 20세기 후반부터 일련의 생산자들이 랑그독의 적당한 떼루아를 찾아 아낌없는 투자를 하면서 자유로운 방식으로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AOC에 비해 규정이 유연한 IGP는 생산자의 재량을 대폭 허용하기에, 창의적인 와인생산에 유리하다. 대부분의 프랑스 AOC 와인들과 달리 IGP 뻬이독 와인은 신대륙 와인처럼 레이블에 포도 품종을 표시한다. 전통적인 스타일보다는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와인을 만든다.

IGP 뻬이독에서 1970년대 개척자는 마스 드 도마스 가삭(Mas de Daumas Gassac)이다. 보르도에서 활동하던 지질학 교수 앙리 앙잘베르(Henri Enjalbert)에 의해 발견된 떼루아인데, 1978년 첫 빈티지부터 '남부의 샤또 라피트'라는 평가를 받으며 '랑그독의 제왕'으로 등극했다.

정작 샤또 라피트를 만드는 '도멘 바롱 드 로칠드(Barons de Rothschild)'는 10년 넘는 세월 동안 프랑스 남부에 최적의 테루아를 찾다가 1999년 랑그독 AOC 꼬르비에르(Corbieres)의 도멘 도시에르(Domaine d'Aussieres)을 인수하면서 남부 프랑스 와인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샤또 무똥 로칠드를 만드는 '바롱 필립 드 로칠드(Baron Philippe de Rothschild)'도 오퍼스 원(미국)과 알마비바(칠레)에 이어 남프랑스 최고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가문의 포부와 자부심으로, 1998년 랑그독의 리무(Limoux)에 도멘 드 바로나르크(Domaine de Baron'Arques)를 설립해서 첫 빈티지 2003년으로 AOC 등급을 받았다. 서늘한 대서양 기후 영향을 받는 리무에서는 샴페인보다 100년 이상 빠른 1531년부터 세계 최초의 스파클링와인을 생산했다.  신성식 ETRI ICT전략연구소 연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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