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지 이응노미술관 학예사.
김현지 이응노미술관 학예사.

직장인으로 살아온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반복되는 일상에 무료함도 일종의 기본 아이템이 된 지금. 일상 탈출을 위해 중간중간 여행을 가고,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을 보기도 하지만 그런 기쁨도 찰나라는 것을 이제는 너무 잘 안다. 자기 전 1분 내로 끝나는 유튜브 쇼츠를 즐겨본 지가 꽤 됐다. 그러다 최근 알고리즘에 이끌려 마블 시리즈 요약본 같은 것을 접하게 됐다.

아이언맨, 토르, 캡틴아메리카, 돌이켜보니 시리즈 대부분이 본 것이었다. 마블 시리즈는 어찌 보면 입구와 출구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영화들이다. 슈퍼히어로들이 악당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 하지만 캐릭터가 각기 다르기에 거기서 나오는 무궁무진한 매력이 인기를 끄는 요소인 것 같다. 슈퍼히어로들이 악당을 박살 내는 내용을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스토리에 빠져 들게 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멋진 음악과 함께 제작진 소개 자막이 올라가면 또다시 현실의 나를 마주하게 된다. 방구석에 누워서 영화를 방금 재미있게 본 내일 출근하기 싫어하는 나. 히어로영화를 봤다 한들 내 모습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내가 유치원생 정도였다면 '나도 슈퍼히어로가 되면 얼마나 멋질까? ' 뭐 이런 상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나이가 많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못 하는 게 너무 많다. 유튜브 요약본을 통해 다시 만나본 슈퍼히어로들처럼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초능력은 당연히 없다. 캡틴 아메리카와 같이 강인한 정신력과 피지컬이 있지도 않다. 이런 대단한 것들을 배제했을 때도 너무 평범한 것 같다. 거창하게 갈 것도 없다. 당장 내일 휴가를 쓰고 집에서 놀고 싶은데 휴가도 다 소진해서 당분간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런 나는 대체 무슨 재미로 살아가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가 어려워서, 사실 지금도 완벽한 답을 찾을 것은 아니라서 고민은 계속될 것 같다. 하지만 지금까지 발견한 작은 답에 대해 이 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과 나누고 싶다. 나는 슈퍼히어로는 아니지만, 아침에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넬 수 있다. 가끔은 주변 사람들에게 커피 한 잔을 살 수 있다. 식당에서 밥 먹고 나올 때 '잘 먹었다'라는 인사를 건넬 수 있다. 그 밖에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 '고맙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자잘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이 꽤 있는 것도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세상을 구하는 슈퍼히어로들이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화려하게 빛나거나 어디에다가 내세울 수는 없는 것들이다. 이런 자잘한 이야기로는 영화를 만들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별거 아니게 느껴지고, 무료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나는 내 나름대로 '나만의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일들을 하고 있다. 딱히 파급력이 없는 행인 1 비중의 역할이어서 어디다 자랑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주변 사람들에게 '그 영화에 내가 행인으로 나왔으니 한번 찾아봐!'라고 말할 수는 있는 정도랄까.

30대 김 씨는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마트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내 뒤로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가 따라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습관적으로 문을 잡고 몇 초를 기다린다. 오늘따라 그 모르는 분께서 방긋 웃어주셨다. 별일도 아닌 건데, 세상은 딱히 바꿀 수가 없고 슈퍼히어로도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데, 그래도 그 미소를 보니 기분이 꽤 괜찮은 것만 같다.  김현지 이응노미술관 학예사

김현지 이응노미술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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