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자 시인
김숙자 시인

산과 들이 저마다 초록 옷으로 갈아입고 마음속에 담긴 노래들을 꽃으로 피워내는 아름다운 5월이다. 해님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새들도 그토록 멋진 노래를 부르고, 작은 풀잎들마저도 초록붓으로 이렇게 예쁜 그림들을 그려낼 수 있을까? 그러기에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도무지 무색하지 않다.

오늘 아침 우리 집 베란다에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친정 뜨락에서 귀하게 분양해온 진분홍빛 모란이 아낌없이 그 위용을 발휘했다. 너무도 반갑고 애틋한 모습이다. 마치 눈부신 그 '모란꽃잎'이 그리운 어머니들 모습을 소환해 내주고 있다. 아주 오래 전 어버이날로 기억된다. 내가 먼 곳으로 직장생활을 하며 통근시간에 늘 동동걸음을 치던 때였다. 다음 날이 어버이날인줄도 깜빡하고 카네이션마저 준비를 못한 채 퇴근하고 말았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가장 어렵다는 시누이의 시어머니인 고향 사부인까지 와 계셨다. 두 분은 사돈 간인데도 같은 고향에서 유난히 친하게 지내오신 처지였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반가움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지만 어버이날의 준비가 불충분해 도무지 내가 안절부절이다. 다음날 아침 낯이 뜨거워 얼굴조차 들 수 없을 것 같다. 다른 땐 이렇게 어버이날의 준비가 소홀하진 않았다. 그런데 사부인까지 와 계신 마당에 가장 기본인 카네이션 바구니 하나 준비 못하고 퇴근을 해버린 내가 너무 못나 보였다. 밤새 내 잠이 오질 않아 어떻게 내일 아침을 보내 드릴지 걱정으로 날이 밝았다.

새벽녘에 두 분께 드릴 편지와 금일봉을 조금씩 준비 해놓고 빨래를 널려고 베란다 불을 켰다. 창문을 여는 순간 너무도 눈이 부셨다. 거짓말처럼 내 두 눈에 비추어진 그 찬란한 분홍빛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헛것을 보았나?' 하고 다시 한 번 눈을 비벼보니 이건 꿈이 아니었다. 정말 내 눈앞에 오래 길러왔던 공작 선인장이 탐스러운 꽃봉오리 두 송이를 보란 듯이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구세주도 이런 구세주가 없었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연신 속으로 내뱉으며 급히 가위를 가지고 나와 그 꽃 두 송이를 조심스레 잘라 냈다. 너무 예쁜 모습에 미안감도 있었지만 내 체면과 어버이날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궁하면 다 통한다 했던가? 그 눈부신 꽃 두 송이를 호일로 예쁘게 감고 옷핀으로 고정해 그날 아침 두 분의 가슴에 달아드렸다.

"아유 곱기도 해라. 카네이션보다 훨씬 더 예쁘네" 하시던 두 분의 칭찬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이제 그 꽃을 받고 즐거워하실 어머님이 정작 곁에 계시지 않는다. 어버이날이 돌아와도 즐거움보다 서글픈 마음이 더 가득하다. 후회는 앞서는 일이 없고, 세월은 나를 너무 늦게 철들게 한 것 같다. 이렇게 헤어짐이 빨리 찾아올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김숙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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