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욱 한국원자력연구원 초고속방사선연구실 책임연구원
정영욱 한국원자력연구원 초고속방사선연구실 책임연구원

꽤 오래전에 우연히 강남의 어느 지하상가를 지나다가 작고한 가수의 앨범을 산적이 있다. 노래와 함께 가수가 실제 공연에서 했던 이야기가 중간중간 들어 있었다. 1000회가 넘는 공연을 지속한 비결로 '바둑을 이기려고 두지 않았습니다. 그저 돌 하나 하나 정성들여 놓다보니 기성도 됐고 명인이 됐지요'라는 바둑 기사 조지훈의 말을 인용했다.

과학자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연구'라는 긴 시간의 싸움에서 과학자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열정과 에너지를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는가이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그 앨범에 수록된 '나른한 오후'라는 곡을 설명하던 이야기였다. 얼굴에 자꾸 내려앉는 파리를 쫓는데 손조차 사용하기 귀찮아하는 상황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열정을 불태우던 연구가 어느 날 심드렁해지고 간단한 계산조차 하기 싫어지는 상황이 되면 나는 그 가수가 표현했던 극심한 '귀차니즘'의 순간을 떠올린다.

과학자에게 연구 결과는 오랜 기간 지속한 집중의 산물이다. 필자도 아주 오래전에 수년간을 오로지 한 문제에 매달려, 삶이 피폐해지는 것도 괘념치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극적인 성공의 순간을 겪은 후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무기력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때는 그것이 당연히 누려도 되는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구를 지속하다 보니 아주 난감한 상황을 겪게 되었다. 그리 대단한 노력과 집중도 하지 않았던 아주 작은 성과의 뒤, '이제는 본격적으로 잘 해 보자'라고 생각한 순간에 무기력의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것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영원히 집중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의 시간이었다. 편하게 읽던 논문도 내용은 사라지고 글자만 하나씩 밟혔다.

무기력의 슬럼프는 일 중독자 또는 완벽주의자에게 더 잘 생긴다고 한다. '완벽한 일처리'라는 의식이 내재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그래서 더 많이 또 광범위하게 발생하나 보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학업에 직접 영향을 미치다 보니 의학계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무기력증은 '번아웃 증후군'이라고도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고 태워버린 상태다. 달리 표현하면 자신이 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이미 충분히 집중했다는 뜻이다. 필자의 경우도 젊었을 때와 비교해 집중할 수 있는 정도와 지속 시간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줄어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고 집중하기를 원한다면 무기력의 슬럼프가 항상 불청객처럼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개인적으로 무기력의 슬럼프를 이겨내는, 또는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을 나름 터득하게 되었다. 소소하게는 매일 이어지는 집중의 시간을 잠시 끊어주는 운동과 여행과 같은 취미활동이 효과가 있었다. 설거지와 같이 단순하고 머리를 비울 수 있는 행위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과학자들의 발표를 집중해서 듣고 또 토론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큰 자극이 됐고 슬럼프를 탈출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때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고, 다시 연구에 집중하고자 하는 강한 동기도 생겼다.

그런 이유로 비슷한 주제를 공유하는 국내외 과학자들과의 작은 학술 모임을 꾸준히 지속하려고 노력했다. 과학자로서 가장 기쁜 것 중의 하나는 인종, 국가, 성별, 나이를 넘어서 누구와도 허심탄회하게 교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처음 만난 과학자도 그가 고민하고 집중했던 이야기에 빠져드는 순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빛나는 노력에 나 자신을 비추면 어느새 무기력의 시름은 사라지곤 한다. 무기력의 슬럼프가 우리 사회의 산물이라면 그 해결책도 함께 소통하며 얻는 것이 당연할 터이다.

정영욱 한국원자력연구원 초고속방사선연구실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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