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환 전 국립오페라단 지휘자, `베토벤 아저씨` 저자
이상환 전 국립오페라단 지휘자, `베토벤 아저씨` 저자

브루크너는 1824년에 태어나 1896년에 생을 마친 오스트리아 작곡가이다.

그는 30세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작곡가의 길로 들어섰지만, 대기만성형으로 성장해 음악사에서 최고의 교향곡 작곡가로 이름을 남겼다. 브람스는 브루크너를 가리켜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심포니 작곡가이다"라고 말했다.

브루크너는 오스트리아 린츠시 근교 안스펠턴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자랐다. 그리고 린츠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4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비엔나에 등장했다. 당시 비엔나에는 이미 브람스가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이때 브루크너가 그 텃세심한 비엔나의 음악계에 입문한 것이다. 그것도 브람스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던 독일의 바그너를 지지하는 자로 나타났다.

말할 것도 없이 브람스 옹호자들은 브루크너를 미워했을 뿐 아니라, 아예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 무리의 중심에는 비평가 한슬릭이 있었다. 한슬릭이란 사람은 빈의 평론가 무리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사람이었다.

결국 그들의 시기를 받던 브루크너는 연주 때마다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1877년 12월 브루크너가 `바그너 교향곡`을 초연할 때에는, 브루크너를 시기하던 한 사람이 연주 중 크게 비웃으며 자리를 뜨자 모두 웃음을 터트리며 나가버리고 말았다. 마지막에는 10여 명과 입석에 있던 브루크너의 제자인 말러와 몇 명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또 때론 오케스트라 단원들로 연주가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연주불가"라고 통보해 연주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바로 그때 브루크너에게 인생역전을 가져다 준 교향곡 7번이 마쳐졌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이 교향곡에는 영혼의 음색을 가진 바그너튜바도 새롭게 투입되었다. 특히 2악장은 교향곡사에서 죽음과 애도를 표한한 최고의 명곡으로 쓰여 진 작품이었다.

브루크너는 이 교향곡의 초연장소를 두고 고심하고 있었다. 때마침 독일에서 활동하던 지휘자 니키쉬가 이곡을 접하고 관심을 갖는다. 브루크너는 그것을 계기로 7번의 초연을 비엔나가 아닌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렇게 1884년 12월 그의 7번 교향곡은 독일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었다. 공연은 큰성공을 거두었다. 브루크너는 연주 중에도 몇 차례나 무대로 나와 인사해야 했고, 곡을 마치고는 유례없는 환호가 터져 나와 15분여 간이나 이어졌다고 한다.

그 명성을 타고 교향곡 7번은 곧 뮌헨에서도 연주되었다. 그리고 독일뿐 아니라 네덜란드, 시카고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그리고 헝가리와 영국에 까지 이어갔다. 그리고 드디어는 비엔나 근방 그라츠에서도 연주되어 호평을 받게 되었다.

결국 이것으로 브루크너를 시기하던 빈의 한슬릭과 그의 추종자들은 끝내 브루크너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초연 2년 후, 1886년에는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서도 이 교향곡은 연주되었다. 연주가 끝나자 비엔나의 많은 사람들은 브루크너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곳곳에서 후원자들이 생겨났고, 정부에서는 종신연금을 결정했으며 왕은 브루크너에게 벨베데레 궁전에 있는 방을 하사해 살게했다.

이어진 브루크너의 8번 교향곡도 비엔나 필하모닉에 의해 큰성공으로 초연되었다. 평론가들은 그의 8번 교향곡을 가리켜 "19세기 음악의 황제"라고 평가했다.

만약 브루크너가 그의 교향곡 7번을 독일 라이프치히가 아닌 비엔나에서 초연했었다면, 어쩌면 한슬릭과 브람스의 추종자들로 인해 다시한번 혹평에 시달렸을지도 모르겠다.

브루크너에게 인생역전과 최고의 영예를 가져다준 교향곡 7번, 그리고 생각의 전환과 결정,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주는 지혜가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이상환 전 국립오페라단 지휘자, 베토벤 아저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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