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사람들은 얼마만큼 살았을까. 우선 우리 지폐를 보자. 신사임당 48세 세종대왕 54세 율곡 49세 퇴계 70세. 연구에 의하면 영아 사망을 제외하곤 대개 50세 전후였다고 하니, 지금으로 보자면 한창 일할 장년의 나이에 죽음을 맞았고 환갑잔치는 실로 축복이었다.

그러면 조선조 장수(長壽)로 이름난 집안은 어딜까. 경북 안동 사람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집안을 꼽는다. 시조 `농암가`로 유명한 본인도 89세까지 살았고 부친 98세, 모친 85세, 숙부는 99세, 동생 둘은 각기 91세, 86세, 거기에다 외조부 93세, 외숙부 93세 등 정말 어안이 벙벙해지는 장수였다. 후손들도 장남 84세를 비롯해 7대 200년간 평균수명이 80세 가량이었다.

농암은 어렸을 때 평소 놀기를 좋아하고 호탕한 성격에 학문에는 흥미가 없었다. 나이 스물에 크게 깨달은 바 있어 공부에 매진, 서른 넘어 대과에 급제한다. 그런데 그 으스스한 연산군 시절에다 초기 벼슬이 하필이면 사관(史官). 무오사화(1498)의 피바람이 아직 가셔지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농암은 사관이 대간보다 더 임금 가까이 자리해야 한다는 둥 사관도 정청(政廳)에 참여해야 한다는 둥 겁 없는 소리로 연산군의 심기를 건드린다. 이어진 갑자사화(1504)의 광풍 속에서 연산군은 이런 명을 내린다. "지난 날 낯이 검고 수염 많은 놈이 신입 사관 주제에 옳지 않은 주장이 많았다. 그 놈을 잡아다 장형에 처하라." 바로 이현보였다. 이후 또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석방이 되어 주변에서 깜짝 놀랐다. 연유를 알고 보니 연산군이 석방자를 가려내던 중, 붓에서 떨어진 먹물이 실수로 농암의 이름위에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참으로 기적 같은 생환이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조정에 복귀. 굳이 외직을 자청해 고향과 멀지않은 여덟 고을의 수령을 맡으면서 30여 년의 세월 동안 고향을 오가며 지극정성으로 어버이를 모셨다. 명절이면 고향집 앞 농암 바위에 양친을 모셔놓고 자제들과 함께 술잔을 올리며 색동옷을 입고 놀았다. 안동부사 시절엔 관내에 사는 팔순 넘은 노인 수백 명을 초청하여 성대한 양로연을 베풀었으니 그 유명한 `화산양로연`이다. 남녀 귀천이 유별하던 그 시절에 남자 여자 양반 상민이 한자리에 어우러진 이 혁명적인 잔치에서 고을 원님 농암은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며 노인들의 흥을 돋구었다. 홍문관 부제학 재임 중엔 구십세를 넘긴 부친 숙부에다 장인과 고을노인 여섯까지 더해 `구로회(九老會)`라 이름 짓고 잔치를 벌인다. 당시 예순일곱 노인이던 농암은 자손들이 앞에 그득한데 애기처럼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피웠다. 농암의 재롱잔치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고 또 후손들에 의해 구로회는 이백여년을 이어져 갔다. 지금도 안동시 도산면 낙동강 변 농암종택엔 장수의 전통이 꿋꿋하다.

애기 품은 여인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늙은 어미 끌어안고 환히 웃는 자식의 백발과 주름도 그 또한 아름답다. 일흔 나이에 부모님을 앞에 두고 색동옷 입고 춤을 추던 이현보가 진정 행복한 사람 아니었을까? 그게 바로 무병장수로 가는 길이 아니었을지. 물론 폭군 연산임금이 베풀었던 그 은혜(?)도 분명히 한 몫을 했지만 말이다.

대전보건대 방송문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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