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완벽주의 ‘마에스트로’ 명성- 이상철 순수예술기획 대표

공허한 눈을 뜨고 손가락 하나로 침대에 누워 지휘하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 미소를 띠며 '모차르트'라는 말을 두 번 되풀이한다. 이 모습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1860-1911)의 임종 직전의 모습이다. 말러는 폐렴을 수반한 폐렴증성 편도선염의 징후를 보이며, 5월 18일 폭풍우 속에서 죽어갔다.

말러는 1860년 7월 7일, 지금의 체코슬로바키아의 칼리슈트라는 보헤미아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 계 유대인의 아들로 그의 인생의 시작에서부터 인종적 불안감과 긴장감을 가지게 된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오스트리아의 소수민족 중에서도 아웃사이더였고, 독일에선 보헤미아 출신의 오스트리아인이며 유대인으로 아웃사이더였다. 열네 명의 형제자매 중 두 번째로, 다른 남매들은 어릴적부터 질병에 걸리거나 죽어갔다. 그의 막내동생 역시 음악적 재능이 있었음에도 자살한다. 결국 여섯 형제만 살아남게 되었는데 이러한 환경적인 요소가 말러의 삶에 영향을 주기에 충분했다.

죽음과 질병, 불안과 출신에 대한 긴장감은 그에게 고통을 주는 동시에 삶의 고뇌로부터 명작을 많이 남기게 된다. 그의 미친듯한 예술을 향한 갈구와 집중은 자기 자신의 허약한 체질을 극복하게 만들었고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음악을 향한 극단적인 완성주의자로 만들었다. 무자비할 정도의 완벽주의자로서 말러는 음악에 있어서 그 누구와도 타협을 하지 않았으며 양보도 하지 않았다. 위대한 지휘자마다 광적인 독재가 존재했지만 말러는 그 이상으로 독재적인 성향을 말년까지 유지하였다. 작고 마른 몸매에 길고 창백한 얼굴, 진흙색 머리칼에 둘러싸인 가파른 이마, 표정의 기기묘묘한 변화를 나타내고 있는 안면의 고통과 긴장으로 엮어진 주름살을 가진 고집스런 모습으로 오직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만 집중하였으며 지휘 연습 중에는 소리를 지르는 게 다반사로 때로는 발을 굴렀으며 단원들을 잔인하고 냉정하게 다루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 단원들마저 주저없이 희생시켰는데 연주가 서툰 연주자들만 집어내어 그들만 따로 세워 연주하게 함으로써 모욕을 주기도 하였으며, 음악을 위해서 가차없이 연주자를 해고하기도 하였다.

그가 죽기 바로 직전인 1910-1911년엔 이미 심장병으로 고통받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겨울 시즌 동안 총 48회의 공연을 지휘하였다. 1911년 2월 20일, 말러는 편도선이 부어 열이 올라 의사가 연주회장을 가지 말라고 권한다. 하지만 그는 끝내 옷을 둘둘 감고 차를 타고 카네기 홀로 간다. 그는 결국 이날의 모든 작품을 연주하고 만다. 이것은 그의 생애 마지막 콘서트가 된다. 이날 이후부터 그는 모든 에너지가 바닥난 듯 다신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겨우 석달이 된 5월 18일 사망한다.

그가 심장병을 선고받은 만년의 3년 동안 '대지의 노래'와 '제9번 교향곡', 미완성인 '제10번 교향곡'을 남기게 되는데, 사실 '대지의 노래'가 제9교향곡이 되지만 말러는 이 9번째 교향곡을 작곡하는 것에 극도로 민감하여 분명하게 차별되는 성격의 다른 교향곡을 작곡한다. 왜냐하면 베토벤과 브루크너 두 위대한 음악가들이 교향곡을 9번까지 완성하고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9번이라는 숫자를 피하려 '대지의 노래'라는 교향곡을 작곡하게 되는데 '제9번 교향곡'을 작곡할 당시 그는 아내에게 '대지의 노래'가 원래 9번째 교향곡라고 털어놓았는데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도 '대지의 노래'는 교향곡의 기존 형식을 탈피하려 했다. '대지의 노래'는 교향곡과 연가곡의 중간에 해당되는 장르가 모호한 작품으로 외적인 구성 면에서는 교향곡으로 볼 수 있고 말러 자신도 이 작품을 교향곡이라고 했지만, 시를 텍스트로 한 여섯 개의 악장이 이어져 있는 데다 내용 면에서 긴밀하게 연계된다는 점에서 연가곡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말러는 '제10번 교향곡'을 완성하지 못했으며, '제9번 교향곡'의 초연도 보지 못한채 사망한다.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강은선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