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도 안 걸려 졸속 발굴 무령왕 출생비밀 의견 분분

우연하게 발굴된 무령왕릉은 위대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고고학 발굴사에서 뼈아픈 실수로 기록된다. 기록이 몇 남아있지 않은 백제사를 풀어줄 실타리였음에도 발굴이 채 하루도 안 걸렸다는 ‘졸속 발굴 논란’으로 40년이 지난 오늘까지 아쉬움을 더한다.

매끄럽지 못한 발굴 과정은 많은 논쟁 거리를 낳았다. 당장 무령왕릉이 처음 발굴된 처녀분인지에 대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발굴 당시 부장품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처녀분이 아닐 것이라는 설이 제기됐다. 학계는 지진에 따른 봉분 내부의 흔들림이 원인이라지만 석수의 다리가 부러진 것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무령왕릉 자체만으로도 수수께끼는 더 있다. 무령왕의 출생 비밀에 얽힌 사료의 엇갈림이 대표적이다.

무령왕은 왜 일본에서 태어났는가, 무령왕은 누구의 아들인가하는 문제는 해묵은 사학계의 논쟁거리다.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의 부친으로 동성왕을 지목했지만 일본서기는 개로왕으로 기록했다. 일본서기는 탄생 비화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한다. 일본 오사카 부근에 실재하는 곤지의 신사와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각라도(가카라노시마)의 동굴은 이를 뒷받침한다.

사망 이후 3년만에 무덤에 안장했다는 지석의 내용도 관심을 모은다. 무령왕비의 경우 서쪽에서 상을 지내고 대묘에 모셨다(거상재유지·居喪在酉地)고 기록하고 있다. 학계는 1995년 발굴된 공주의 정지산 제사 유적을 유지(酉地)로 지목한다. 정지산은 백제의 왕성인 공산성의 서쪽에 있다.

무령왕릉을 축조한 사람들의 국적은 어디인가. 직경 20m 규모의 거대한 봉분에서 쏟아져 나온 부장품 가운데 도자기류는 대부분 ‘메이드 인 차이나’였다. 고분의 구조 역시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덤 양식이다. 중국인이 직접 만들었는지, 기술을 도입한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또 목관의 재료인 금송에도 관심이 쏠린다. 삼국시대 목관 중 형체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은 놀랍게도 일본산이다. 전자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 본 세포 구조는 1과 1속 1종 뿐인 일본 금송으로 분석됐다. 이에따라 몇개의 역학관계가 도출된다. 일본의 진상품인지, 하사품인지 또는 완성품을 수입했는지, 자재를 수입해 조립했는지 등이다.

중국 사서인 ‘양서’는 무령왕이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만들었다고 기록한다. 무령왕이 중국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고, 일본으로 오경박사를 파견하는 등 선진화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고구려 장수왕에게 고도(古都) 한성을 뺏긴뒤 귀족들과 힘 대결 속에 3명의 왕이 암살당하던 웅진(공주) 백제 시대를 새롭게 중흥기로 이끈 무령왕에 대한 평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권성하 기자 nis-1@daejonilbo.com

박병준 기자 joonzx@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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