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이후 민의원·참의원 부정선거… 투표함 부수고 불질러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이 무너지고 제 5대 총선이 실시됐다. 6월 15일 양원제와 내각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이 통과되고 새 선거법에 따라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가 치러진 것이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몰락한 뒤 희망과 기대 속에 투표가 진행됐지만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 시비가 잇따랐다. 그중에서도 대전과 서천의 선거 폭력사태는 온 국민은 경악케 했다. 투표함을 내던지고 불을 지르는 등 극렬한 양상을 띠었던 것이다.

7월 29일 실시된 선거에 충남에서는 민의원 22명에 136명이 지원 6대1, 6명을 뽑는 참의원은 정원 6명에 23명이 등록하여 약 4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자유당계가 몰락하고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대결 양상으로 전개됐는데 민주당의 우세 속에 혁신계와 무소속이 도전하는 상황이었다.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이라는 거센 파고를 겪은 탓으로 선거전은 차분하게 진행됐다. 대전일보 7월 30일자에는 ‘4월 혁명의 환희 속에 엄숙한 심판, 평온한 분위기 속에 투표…’라고 선거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나 개표 과정에서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대전일보 7월 31일자 ‘대전 갑구·부여서 개표 중단 소동 폭력화’라는 기사에는 충격적인 사진과 내용이 실렸다.

8명의 후보가 출마한 민의원 대전 갑구 개표 과정에서 부재자 표를 싸고 시비가 벌어졌다. 부재자 투표 신고자는 1398명인데 투표수가 1440표로 42표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 후보측을 제외한 나머지 7명의 참관인은 퇴장해버렸다. 개표위원장은 부재자 투표는 맨 나중에 개표하고 증거보전을 위해 가처분을 하겠다며 직권으로 일반 투표함 개표를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날 7명의 후보는 ‘부정선거 보고회’를 열어 선관위원 불신임을 결의하고 개표 중단을 요구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선거운동원 등 수십명이 경찰과 헌병의 저지선을 뚫고 대전시청 3층에 마련된 개표장에 난입하여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투표함을 창밖으로 내던졌다. 민의원 투표함 20개 중 17개와 참의원 투표함 1개가 시청 마당에 떨어져 박살났다. 대전지검은 검사를 현장에 곧바로 파견해 수사를 시작했다.

대전 을구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부재자 신고는 1440명인데 투표수는 1394표였다. 선관위 조사 결과 대전 갑구와 을구의 부재자 신고자의 숫자가 바뀐 것으로 드러났다.

부여에서도 부정 의혹이 제기됐다. 규암면 투표함에서 1할에 이르는 문제표가 발견되자 야당 지지자들은 부여군청 앞으로 가두시위를 벌이고 경찰과 충돌하여 군청 정문을 파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부여는 선관위의 조치에 따라 정상적으로 개표가 계속됐다.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 곳은 서천이었다. 4명의 후보가 출마한 이곳은 마서면 화양면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화양면 2투표구에서는 실제 투표자수보다 40매 많고, 3투표구에서는 38매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선관위가 사무착오라고 해명했지만 야당측 참관인들은 부정이라고 주장했다. 야당측은 대리투표가 이뤄졌고 선거 종료시점이 오후 4시인데 화양면에서는 5시 15분까지 투표가 실시됐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6백여 명의 시민들이 동조하여 군청에 난입, 22개의 투표함을 끌어내 불을 질렀다. 서천 선거 폭동에 접한 홍성지청은 후보자 3명과 측근, 주동자 17명을 구속하고 37명을 연행, 조사를 벌였다.

투표함에 파괴되고 소실돼 개표가 이뤄지지 못한 민의원 대전 갑구와 서천은 중앙선관위 결정에 따라 8월 13일 재투표가 실시됐다. 재투표는 평온한 분위기 속에 치러졌고, 개표도 경찰의 삼엄한 경비와 언커크 시찰단의 참관 속에 별 다른 말썽 없이 이뤄졌다. 개표 결과 대전 갑에서는 민주당 유진령, 서천에서도 민주당 우희창 후보가 큰 표 차이로 당선됐다. 이들 후보는 7월 29일 이뤄진 투표의 개표에서도 다른 후보자들보다 많은 표를 획득했었다.

대전 갑구 선거에서 투표함 20개 중 17개를 강탈하여 내던지고, 서천에서 22개 투표함을 불태운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를 부정하고 모독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투표함 보전과 재개표 등 법적 절차를 무시한 채 군중심리에 휩싸여 투표함을 강탈하여 파괴하고 불태움으로써 선관위나 사법당국이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여지를 없앴다.

선거 폭력의 대가는 컸다. 대전일보 8월 3일자에는 ‘속속 검거되는 난동자들’이란 기사에는 대전 갑구 및 서천, 공주 선거 폭력과 관련 64명을 구속하고 배후를 추적 중이라고 나와 있다. 9월 29일자에는 ‘주권을 짓밟고 준엄한 심판대 앞에’라는 기사가 실렸다. 대전 갑구 선거 난동 사건 재판정의 사진과 33명의 범죄 사실을 게재했다. 검찰은 주동자 2명에게 5년을 구형하는 등 전원에게 실형을 구형했다.

대전 갑구와 서천의 선거 폭력은 여론의 비난도 거셌고 죄질이 나빠 재판부도 엄벌에 처했다. 허나 선거 폭력 가담자들도 어찌 보면 시대의 희생자였다. 4.19혁명이 독재 부패정권을 몰아내는 빛나는 업적을 남겼지만 사회 일각에 ‘다수에 의한 행동은 무엇이든 용납된다’는 그릇된 인식을 확산시켰다. 평교사 인사에 불만을 품은 고교생들이 도지사 관사 앞에서 시위를 하는 ‘데모 만능 시대’였던 것이다.

김재근<대전일보 미디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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