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빨치산 1955년까지 준동하다

1950-55년 대전일보에는 빨치산에 관한 기사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당시 글은 빨치산을 ‘공비’ 또는 ‘잔비(殘匪)’라고 적었다.

대전일보 기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총탄이 날아다니는 토벌현장을 동행 취재했다. 종군기자인 함재준(咸在俊) 기자를 비롯 이보형(李輔亨), 정태용(鄭泰龍) 기자 등이 바로 그들이다.

함 기자는 51년 5월 14일자에 공비의 습격으로 파괴된 논산군 연산시내 르포기사를 실었다. 함기자는 이 기사에서 전매서, 면사무소 등 주요건물은 온데간데 없으나 시장은 번창하기가 명동거리와 같다고 전했다. 함 기자는 52년 6월 24일 호남선 열차 전복 사건도 취재했다. 당시 빨치산 1백여명은 광주 인근 신흥리역에서 열차를 전복시켜 46명을 숨지게 하고 승객 80여명을 납치해 달아났다.

이보형 기자는 여러 차례 대둔산 토벌작전을 동행했다. 51년 5월 17일자 기사 ‘토벌 전과’는 대둔산 남쪽 금산군 남이면 토벌상황을 담았다. 기사는 “때마침 중화기 중대와 본부중대는 일시에 지축을 울리는 포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난데없이 우박 같은 집중공격을 받은 적은 혼비백산하여 오합지졸로 뿔뿔이 흩어져, 갖고 있던 무기와 약탈한 휴대식량과 사제수류탄 등을 내동댕이치고…”라며 눈에 보일 듯 생생하게 현장 분위기를 전달했다. 이 기자는 8월 12일자에도 이진녕 충남지사가 지휘하는 경찰을 따라 대둔산 월성고지 토벌 현장을 취재했다.

청주 주재 정태용 기자는 빨치산의 청주시내 습격사건이 발생하자 대구의 치안국으로 달려가 정부의 토벌계획과 사태 수습방침을 취재했다. 정 기자는 옥천 피습 사건 직후 충남·충북·전북 경찰과 미군으로 구성된 전북 운장산 토벌작전도 동행 글을 남겼다.

전쟁터를 누빈 이들 기자의 기사 한줄 한줄에는 땀과 열정과 혼이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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