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일보 로고

김갑동 교수의 대전충청 역사문화 다시보기-이성계의 계룡산 천도 문제

2010-07-26 기사
편집 2010-07-25 06:00:00

 

대전일보 > 문화 > 문화재

  • 페이스북
  • 구글 플러스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블로그
  • 네이버밴드
  • 핀터레스트
  • 기사URL 복사

“개경 떠나야 새로운 정치 펼 수 있어” 의지

첨부사진1

27. 이성계의 계룡산 천도 문제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은 정국의 혼란과 더불어 천도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고려의 수도 개경이 서북쪽의 해안가에 위치해 외적의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경 귀족들의 반대로 천도는 논의에 그치고 실행에는 옮겨지지 못했다. 그러다 역성 혁명으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다사 한번 천도 논의가 크게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계룡산으로의 천도가 시도되었다.

과전법 체제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바 있던 이성계는 1392년 7월 수창궁에서 왕위에 즉위해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를 설치해 군사권을 장악한 그는 관제 개혁을 함과 동시에 명에 사신을 파견해 자신의 즉위를 인정받았다. 한편 국호는 처음 ‘고려’를 그대로 썼으나 명의 요구에 따라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두 개를 올렸는데 결국 태조 2년(1393) ‘조선’으로 정해졌다. 조선은 단군조선에서 취한 것이고 화령은 이성계의 고향인 영흥의 옛 지명이었다.

이제 국호도 새로 정했으니 다음 과제는 신도(新都)의 문제였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또 개경은 고려의 구귀족들이 자리를 틀고 있는 곳이므로 여기를 떠나야 새로운 정치를 펼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즉위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최고 관청인 도평의사사에 한양으로의 천도를 명했다. 그리고는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 이염을 한양에 보내 기존의 궁실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시중(侍中) 배극렴과 조준 등이 여기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궁실과 성곽을 완비한 후에 천도해도 늦지 않다고 건의했다. 이는 사실상 한양 천도를 연기하여 무산시켜보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 곧바로 겨울이 닥쳐와 공사를 하기도 어려웠으므로 한양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양 천도 실패 후 계룡산으로의 천도가 논의되었다. 이는 권중화(權仲和)로부터 시작되었다. 발단은 이성계의 태실(胎室)을 어디에 설치하느냐하는 것이었다. 태실은 태를 보관하는 일종의 함으로 이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 운명이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태실의 위치를 정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이 책임을 맡은 인물이 바로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였다. 그는 임무를 띄고 전국을 돌아다니다 돌아와 보고했다.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에서 길지를 찾았습니다.” 하면서 이 곳의 산수 형세도를 바쳤다. 이에 따라 이성계의 태실은 여기에 안치되었다. 진동현은 지금의 충남 금산군 진산면을 말하는데 예전에는 여기가 전라도에 속해 있었다. 지금은 충북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에 이성계의 태실이 위치해 있다.

이와 함께 권중화는 새로운 도읍지 물색의 임무도 부여받았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계룡산의 도읍후보지 지도도 함께 이성계에게 바쳤다. 이를 본 이성계는 마음을 정하고 지세를 직접 보고자 하여 계룡산으로의 행차를 명하였다. 태조 2년(1393) 1월 19일 드디어 이성계가 개경을 출발하였다. 여기에는 영삼사사(領三司事) 안종원, 우시중(右侍中) 김사형,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지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 등이 동행하였다. 이틀 후 그는 회암사에 들러 왕사(王師)인 승려 자초(自超)도 함께 동행하게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계룡산 남행을 중지해 달라는 건의가 들어왔다. 즉 2월 1일 지중추원사 정요가 대신들의 회의체인 도평의사사의 건의문을 들고 와 남행을 중지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유는 이성계의 아내인 현비(顯妃)가 병이 났으며 황해도와 평안도에 초적(草賊)이 출몰하여 개경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말하였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세가대족(世家大族)들이 모두 싫어하는 일로 이를 구실삼아 중지시키려는 것이다. 재상들은 송경(松京 : 개경)에 오래 살아서 천도를 즐겨하지 않으니 천도가 어찌 그들의 본뜻이겠는가?”하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러자 시종하고 있던 남은이 나서 자신들은 그렇지 않으며 초적의 무리는 본인들이 칠 것이므로 남행을 계속하라 했다. 이에 이성계는 마음을 다시 하여 남행을 계속했다.

이성계 일행은 청주를 거쳐 2월 8일 드디어 계룡산 밑에 당도했다. 이튿날에 이성계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새 도읍의 산수(山水)와 지세(地勢)를 관찰하였다. 그리고서 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성석린(成石璘)·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김주(金湊)·정당 문학(政堂文學) 이염(李恬)에게 명하여 조운(漕運)의 편리하고 편리하지 않은 것과 노정(路程)의 험난하고 평탄한 것을 살피게 하고, 또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와 남은(南誾)에게 명하여 성곽을 축조할 지세를 살피게 했다. 2월 10일에는 삼사 좌복야 영서운관사(三司左僕射領書雲觀事) 권중화가 새 도읍의 종묘와 사직, 궁전·조시(朝市)를 만들 지도를 바쳤다. 이에 서운관(書雲觀)의 풍수학인(風水學人) 이양달(李陽達)·배상충(裵尙忠) 등에게 명하여 지형지세를 살펴보게 하고,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김사행(金師幸)에게 명해 먹줄[繩]로써 땅을 측량하게 하였다. 2월 11일 어가(御駕)가 새 도읍의 중심인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지세를 두루 관람하고 왕사 자초에게 물으니, 자초는 대답했다. “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선뜻 내키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2월 13일 계룡산에 머무른지 5일 만에 이성계는 환궁길에 올랐다. 김주(金湊)와 동지중추(同知中樞) 박영충(朴永忠)·전 밀직(密直) 최칠석(崔七夕) 등은 그곳에 남겨 두고 새 도읍의 건설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성계 일행은 청주와 회암사, 경기도 장단(長湍)을 거쳐 2월 27일 개경에 당도하였다. 개경을 떠난 지 38일간의 일정이 소요됐다.

이후 신도의 건설은 계속되었는데 뜻밖의 사건으로 신도 건설은 중단되었다. 경기 좌·우도 도관찰사(京畿左右道都觀察使) 하륜(河崙)의 상언(上言) 때문이었다. 그의 말은 이러했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이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서면·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臣)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風水) 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강 열람했사온데, 지금 듣건대 계룡산의 땅은, 산은 건방(乾方 : 서북)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 : 동남쪽)에서 흘러 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宋)나라 호순신(胡舜臣)이 이른 바 ‘물이 장생(長生)을 격파하여 쇠퇴와 패망이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이성계는 이 말을 듣고 산수의 형세를 다시 살피게 하고는 대장군 심효생을 보내어 계룡산에 가서 새 도읍의 역사(役事)를 그만두게 하였다. 이로써 새로운 천도 후보지가 물색되고 결국 한양으로의 천도가 이루어지게 됐다.

사실 계룡산 천도 문제의 결과는 풍수지리만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계룡산을 천거한 권중화보다는 하륜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경기도 관찰사였던 하륜이 자신의 관할 구역에 신도를 건설하고자 함이었다. 신도의 건설은 중단되었지만 지금 신도안에는 군의 수뇌부가 존재하고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중요 지역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학장>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