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간 미군 1150명 손실… 역사 속에 묻힌 영웅들

대전전투는 6·25전쟁 초기 거의 모든 전투가 그랬듯 ‘패배’로 기록되어 있다.

논산과 공주를 통해 대전으로 진격한 북한군에 맞서 대전 곳곳에 진지를 구축한 미군이 이들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벌인 치열한 전투였다.

특히 19-20일 이틀간 대전 곳곳에서 전개된 전투에서 미군은 전체 병력의 3분의 1 가량인 1150명의 손실을 입었다. 전사 48명, 부상 228명, 실종 874명. 당시 미 24사단장이었던 딘 소장은 퇴각 도중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고, 지금도 이것은 미군 전사(戰史)의 치욕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대전전투의 ‘패배’와 미군의 희생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대전을 지나 속도전을 치르며 남진을 계획했던 북한은 대전에서 이틀 동안이나 발이 묶였다. 이 기간 동안 당시 국군과 미군이 얼마나 반격을 준비하고, 얼마나 희생을 줄일 수 있었는지는 입증하기 어렵지만, 대규모 전투에서 1-2일간 적군의 발목을 잡는 것은 군소전투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는 것 보다 더 의미가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대전전투는 특히 6·25전쟁에서 3.5인치 로켓포로 북한군 T-34 전차를 파괴한 최초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대전전투를 개인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류철 연구원은 “6월 25일 38선을 넘은 북한군 T-34 전차부대는 대전전투 이전까지 단독작전이 가능했지만 대전에서 미군의 로켓포 공격에 전차가 파괴되는 것을 경험한 이후부터는 보병의 지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7월 3일 한강을 넘은 북한군은 5일 경기도 오산에서 미군과 처음 전투를 치렀다. 미 24사단은 평택-천안, 전의-조치원, 금강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면서 대전에 집결했다. 미 24사단에 내려진 임무는 18일 포항으로 상륙할 예정인 제1기병사단이 영동 부근에서 반격준비를 마치는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하라는 것.

북한군의 본격적인 대전 공격은 19일 오전부터 시작되었다. 북한의 야크 전투기는 옥천 인근 철교와 대전비행장을 폭격했고 북한군 제4사단 5연대는 유성방면에서, 제16연대는 논산방면에서, 3사단은 금강을 건너 대평리에서 대전으로 진격했다. 가수원과 정림동, 유천동, 월평동과 계룡로, 서대전네거리 등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서대전네거리에서는 3.5인치 로켓포로 북한군 탱크를 처음 파괴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병력과 화력에서 열세를 보인 미군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군은 옥천과 금산을 거쳐 영동과 전주 방면으로 후퇴했다. 대전에서 철수했을 당시 미군은 24사단 병력의 30%를 잃었다. 북한군은 사로잡은 미군 포로 가운데 상당수를 즉결처형하기도 했다. 대전은 7월 20일부터 9월 29일까지 67일간 북한군의 지배하에 있었다.

김형석 기자 blade31@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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