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불정책 실시… 천흥사 동종·홍경사 건립

천흥사 동종
천흥사 동종
고려 제7대 임금인 현종(顯宗 ·1009-1031) 대에 와서 충남 지역은 다시 중요 관심 지역으로 부상하였다. 현종은 성종 11년(992) 경종비였던 헌정왕후 황보씨와 태조의 아들 안종 욱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사수현(경남 사천)으로 귀양을 가 보모에게서 자랐다. 그러나 이를 불쌍히 여긴 성종의 배려로 성종 12년(993)에 사수현에 내려가 아버지 안종 욱과 같이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성종 15년(995) 안종 욱이 사수현에서 죽자 그 이듬해 개경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약 4년간 사수현에서 살았던 것이다.

현종의 왕위 즉위는 순탄치 않았다. 목종 즉위 후 김치양과 천추태후(헌애왕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면서 그를 왕위에 앉히려는 책동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천추태후는 대량원군(현종의 어릴 때 호칭)을 강제로 중이 되게 하여 삼각산 신혈사에 거주케 했다. 그리고 몇 차례 그를 죽이려 했으나 여러 스님들의 도움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목종 12년(1009) 천추전이 불타면서 목종이 병들게 되자 목종은 재빨리 채충순·최항 등과 상의하여 신혈사의 대량원군을 모셔오게 했다. 직접 신혈사에 간 인물은 황보유의 등이었다. 이런 차에 목종의 명을 받고 개경으로 오던 서북면도순검사 강조(康兆)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정변을 단행하여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옹립하고 목종을 살해하였다. 그런데 목종이나 강조가 다 같이 대량원군을 목종의 후계자로 생각한 것은 바로 대량원군이 태조의 손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목종이 보낸 황보유의와 강조가 보낸 김응인이 같이 대량원군을 모시고 와 왕위에 옹립하였던 것이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의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즉위 직후 거란의 침략을 받아 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피난 도중에는 전주절도사 조용겸의 습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주절도사 김은부 같은 이는 현종에게 어의를 지어 바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때문에 현종은 돌아올 때 6일 간이나 공주에 머물다 환궁하였다. 그러한 인연으로 김은부의 세 딸이 현종의 부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왕위 즉위 전에 주로 사원에 살았으며 승려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불교 숭배 정책을 실시하였다. 연등회·팔관회를 복설하였으며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화사를 창건하였다. 천안 지역에 있는 천흥사 동종(天興寺 銅鐘)이나 홍경사(弘慶寺)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천흥사 동종은 현종 1년(1010) 만들어졌다. 이 종은 현종이 만들어 봉안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같은 추정의 근거로는 우선 종이 거대하고 문양이 우수하다는 것이다. 이 종은 국보 제280호로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종의 전체 높이가 128.3㎝에 달한다. 이 같은 규모의 종은 지방호족의 힘으로는 주조가 불가능하다.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성덕대왕신종과 같은 신라종의 형태를 계승하고 있다. 또 요(거란)의 연호를 쓰고 있다는 것도 국가나 왕실이 개입했다는 근거다. 천흥사는 태조가 세운 사찰이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현종은 태조의 손자였기 때문이었다.

홍경사에 대해서는 지금도 남아 있는 봉선홍경사사적갈비(奉先弘慶寺事蹟碣碑)에 잘 나와 있다. 봉선홍경사사적갈비는 1962년(원래는 1934년) 국보 제7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천안시 성환읍 대홍리 320번지에 있는데 성환-평택간 국도1호변 상행선 우측도로가의 솔숲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총 높이 358cm, 비폭97cm, 비신 높이188cm, 비신 두께 22cm의 규모를 갖고 있다.

이 비석의 비문 상단에는 ‘봉선홍경사갈기(奉先弘慶寺碣記)’라고 가로로 쓰여져 있다. 특별히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라 한 것은 선친의 뜻을 받들어 지은 홍경사란 뜻이다. 선친이라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 안종 욱(安宗 郁)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안종 욱은 태조와 그의 후비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김씨(金氏)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런데 신성왕태후 김씨는 경순왕의 백부(伯父)인 김억렴의 딸이었다. 그는 경종이 일찍 죽자 그 후비였던 헌정왕후와 관계하여 현종을 낳은 것이었다. 그는 조카인 헌정왕후 황보씨와 사통한 죄로 사수현에 귀양가 있었다. 그는 거기서 죽었는데 죽을 때 대량원군(후의 현종)에게 자신이 죽으면 성황당 남쪽 귀룡동(歸龍洞)에 묻어달라 부탁했다 한다. 그것도 엎어 묻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귀룡동이란 뜻은 ‘돌아갈 용이 사는 동네’로 풀이된다. 자신은 살아서 못간다 하더라도 자신의 아들은 빨리 돌아가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러한 부탁을 한 것 같다. 엎어서 묻으면 눕혀서 묻는 것보다 더 빨리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성종 15년(996) 안종 욱이 죽어 귀룡동에 묻힌 다음 해에 대량원군은 개경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얼마 후 왕위에 올랐다. 현종은 그러한 아버지의 정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불쌍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명복을 빌기 위해 홍경사를 건립하였던 것이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왕명을 받들어 최충(崔沖)이 비문의 내용을 짓고 당시(1026년)의 명필이었던 백현례가 글씨를 썼다. 고려의 제8대 현종 임금께서 부왕인 안종(安宗)이 평소 소원이었던 불법을 널리 전파하고자 했던 뜻을 이어받아 당시 갈대가 우거지고 도적이 자못 출몰하여 행인을 괴롭히던 이곳(옛 직산현 성환역 주변)에 병부상서 강민첨 장군과 김맹을 별감사(別監使)로 삼아 현종 8년(1016)에서 현종 13년(1021)의 만5년에 걸쳐 법당, 행랑 등 200여칸의 건물과 서쪽에 80칸의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 건물을 지었다. 길가는 나그네와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하고 말과 소 등에게는 마초를 제공하여 편의를 도모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현종은 홍경사 뿐 아니라 광연통화원을 건립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려 하였다.

이러한 홍경사가 후대에 와서는 백성들을 수탈하는 장소로 변모하기도 했다. 무신 정권이 들어선 뒤에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무신들이 지방관으로 내려오면서 수탈 체계가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망소이 등의 봉기군을 진압하는데 협조함으로써 명학소 민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찬란하고 웅장했던 봉선홍경사와 광연통화원의 건물들은 명종 7년(1177)에 망이.망소이 형제의 봉기군 등에 의해 전소되고 석탑 일부와 비석 1기만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고려 현종의 애환과 위민 정신은 그가 남긴 유적, 유물 속에 고스란히 간직 되어 있다.

김갑동 (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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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홍경사사적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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