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학의 시조… ‘삼직’ 정신 이어나갈 것”

율곡 이이·우계 성혼·송강 정철이 스승같은 벗으로 삼고 학문을 논했던 조선 중종-선조대의 유학자. 우암 송시열이 학맥을 이어받은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 부자의 스승. 율곡과 함께 닥쳐올 왜군의 침입을 걱정했던 이. 후손자 김덕령 장군을 가르치고 충무공 이순신에게 거북선을 만들게 했다는 야사의 주인공. 그럼에도 역사는 그를 외면했던 이. 그러나 뜻있는 유림이나 역사가 도외시한 이들과 단체는 위대한 스승으로 숭상하는 인물. 바로 구봉 송익필(1534-1599)이다.

부친의 악업과 당쟁의 소용돌이, 노비소생은 노비라는 신분제의 악습에 따라 자신도 그 범주(할머니가 노비 소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그러한 비정한 불문율에도 금산 칠백의총의 주인공인 중봉 조헌이 도끼를 지고 가 구봉의 신원을 청했고 후학인 김장생·서성·정엽·유순익·심종직이 신원상소를 올렸던 이. 영조 때 충청감사 홍계희의 상소로, 노비로 강등된 지 165년만에 사헌부 지평이라는 관직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빛을 보게 된 이가 바로 구송 송익필이다.

지난 3월 17일 당진에서 각계 인사 50여명이 ‘문경공 구봉 송익필(文敬公 龜峯 宋益弼) 선생 선양사업회’를 창립했다. 이홍근(70·사진) 회장을 만나 사연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선양사업회가 왜 당진에서 창립됐나?

“구봉 선생의 53세에서 61세까지 행적은 노비로 강등돼 숨어 살고, 구속되고 풀려나고, 유배 갔다 돌아오고 하는 험난 그 자체였다. 63세에 정한 거처가 당진 면천 마양촌 첨추 김진려의 농막이다. 마양촌은 지금의 당진군 송산면 매곡리 숨은골이다. 또 당진읍 원당리에는 구봉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입한재가 있다.”

-그런 이유만인가?

“구봉 선생은 율곡과 우계 등과 동열의 대학자며 예학의 비조라고 일컫는다. 호서유림 특히 당진유림들이 주축이 돼 입한재를 중건하고 돌봐 왔다. 유림과 후학들의 노력으로 1910년에는 정2품 자헌대부 규장각제학이 특증되고 문경이란 시호를 받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구봉 선생을 흠모하는 이들이 입한재를 찾아와서는 ‘욕할’ 정도로 관리가 소홀했다. 행정의 구봉 선생에 대한 대우는 당진군이 지난 1993년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한 것이 전부다. 따라서 당진에서의 선양사업회 발족은 구봉선생을 새롭게 조명하고 선양하는 첫발걸음이다. 당진에서 싹이 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선양사업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구봉 선생의 학문에 대한 전반적인 사업이다. 학술연구 및 발표, 예학정선 선양을 위한 교실 운영, 장학사업 및 교범편찬, 묘역정비 및 기념관 건립 등이다.”

-전망은?

“우선 회원들의 열정이 대단하다. 전국적으로 구봉 선생을 흠모하는 인사들의 참여도 늘고 있다. 그동안 많지는 않지만 구봉선생을 연구해오던 이들도 선양사업회에 동참시킬 생각이다. 마다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진군과 충남도도 매우 긍정적으로 선양사업회를 보고 있다. 물론 단시일내 소기의 성과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욕심이 앞서 일을 망친다면 구봉선생을 다시 욕되게 하는 것이다.”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선양사업회 사단법인 등록이다. 그것이 첫단추다. 사단법인으로 등록되려면 법인의 재산이 부동산이든 현금이든 일정부분 있어야 한다. 현재 문중과 재산마련을 위해 협의중이며 문중은 부동산을 선양사업회에 희사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협의가 진행중이다. 문중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따라서 선양사업회 사단법인 등록도 문제가 없으리라고 본다.”

-선양사업회가 앞으로 펼친 사업에 걸림돌은 없나?

“그동안 문중과 유림의 갈등이 있어온 것은 사실이다. 제사 모시는 절차에 있어 문중은 후손이란 이유로, 유림에서는 입한제를 중건하고 한동안 돌봐오고 했던 나름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구봉 선생에 대한 서로의 존재이유다. 근래 들어서는 갈등을 서로 해결하려는 분위기 조성되고 있으며 선양사업회가 조정이란 역할을 무난히 해낼 것이라고 본다.”

-구봉 선생에 대해 더 이야기하자. 구봉 선생을 흠모하는 이 또는 단체에 따라 성격을 달리한다.

“그렇다고 들었다. 기본적으로 유림에서는 위대한 도학자·예학자로 숭상하고 있다. 어떤 종교단체에서는 당시 기용이 됐다면 임진왜란을 8개월만에 끝낼 수도 있었던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신선사상을 숭배하는 이들은 도사로도 인식하고 있다. 구봉 선생을 둘러싼 수많은 야사를 보면 구봉 선생의 도사로서의 면모가 자주 언급된다. 그만큼 구봉 선생이 영향력이 컸다는 반증이나 다름없다.”

-그런 내용을 소개하면.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은 자연의 이치를 꿰뚫고 신묘한 병법을 구사하는 인물로 묘사돼 있다. 그 방면에는 단연 으뜸이다. 그런데 충청우도(충남)에 최초로 서원을 세워 후학을 양성한 고청 서기는 제자들에게 ‘제갈공명의 실상을 알려거든 구봉을 보면 된다. 구봉이 제갈공명을 닮은 것이 아니라 제갈공명이 구봉을 닮은 것이다’라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오늘의 관점에서 구봉 선생의 학문을 바라본다면.

“구봉 선생의 성리학은 실천중심으로 불리우는 삼직(三直)이다. 곧 곧은 마음 심직, 곧은 말 언직, 곧은 행동 행직이다.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글·사진=오융진 기자 yudang@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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